미국 원전 보안, 규칙집을 버리다 — NRC 성능기반 규제로의 전환

2026. 6. 28. 00:50원자력 뉴스

"규제가 완화된다"는 말을 들으면, 특히 원전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불안감이 먼저 찾아옵니다. 안전 기준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가 최근 발표한 보안 규제 개편안을 살펴보면, 이 전환이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규제의 작동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도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경비원은 몇 명이어야 할까요? — 처방형 규제의 한계

기존 NRC 보안 규정을 열어보면 놀랄 정도로 세세한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무장 경비원은 최소 10명 이상 배치해야 하고, 조명은 0.2 foot-candle(풋캔들, 조도 단위) 이상을 유지해야 하며, 보안 훈련은 40시간 이상 이수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격리 구역의 폭, 점검 주기, 인력 구성까지 규정집이 직접 지정합니다.

이런 방식을 '처방형(prescriptive) 규제'라고 부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이 약을 하루 세 번, 한 알씩 드세요'라고 처방하듯, 규제기관이 구체적인 수단과 수량을 직접 지정하는 방식입니다. 규칙이 명확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세상이 변해도 숫자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원자력 기술은 1970년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는 대형 원전과는 설계 철학 자체가 다릅니다. 디지털 감시 카메라, 적외선 센서, AI 기반 침입 감지 시스템은 인간 경비원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비원 10명"이라는 숫자가 규정집에 박혀 있으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도입해도 경비원을 10명 미만으로 줄일 수 없습니다. 혁신의 여지가 규정에 의해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달성하라'는 방식 — 성능기반 규제로의 전환

NRC가 2025년에 발표한 제안규칙(Docket ID NRC-2025-1303)의 핵심은 바로 이 처방적 숫자들을 지우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세 가지 기능적 목표가 들어섭니다. 탐지(detect), 지연(delay), 억제(deter) — 침입자를 감지하고, 목표물 접근을 늦추며, 시도 자체를 단념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운영 주체(licensee)가 스스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성능기반(performance-based) 규제'입니다. 도착지는 규정하되, 가는 방법은 각자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도록 합니다. 50명의 직원이 일하는 소형 시험로와 수천 명이 근무하는 대형 상업 원전이 같은 숫자의 경비원을 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열화상 카메라와 자동 경보 시스템을 갖춘 시설이 1970년대 기준의 조도를 맞춰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바뀌는 항목들을 보면 이 논리가 더 선명해집니다. 격리 구역의 세부 치수 기준은 기능적 성능 기준으로 대체됩니다. 0.2 풋캔들 조도 기준은 삭제되고, '모든 시간대에 탐지·평가 기능을 달성하라'는 요건으로 바뀝니다. 보안 프로그램 검토 주기도 고정된 24개월에서 위험도 기반 검토 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심지어 외부 법집행 기관이나 무장 대응 인력의 활용도 NRC 승인을 전제로 허용됩니다.

그렇다면 안전은 누가 책임지나요?

가장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숫자를 없애면 기준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NRC의 답변은 명확합니다. 숫자가 사라지는 것이 기준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운영 주체가 자신의 시설 특성을 분석하고, 위협 시나리오를 평가하며, 선택한 보안 수단이 탐지·지연·억제 기능을 실제로 달성함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더 무거워집니다. '합리적 보증(reasonable assurance)' — 즉, 보안 수준이 충분하다는 근거를 NRC에 제시해야 합니다.

NRC의 승인, 검사, 감독 기능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달라지는 것은 무엇을 검사하느냐입니다. 경비원이 10명인지 세는 대신, 해당 시설의 보안 체계가 실제로 침입자를 탐지하고 저지할 수 있는지를 평가합니다. 결과 중심의 감독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비용 절감 효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NRC는 30년을 기준으로 할인율 7% 적용 시 약 5.61억 달러, 3% 적용 시 약 10.1억 달러의 순비용 절감이 예상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불필요한 행정 부담과 경직된 요건이 얼마나 큰 비용을 초래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규칙이 적을수록, 책임은 더 커집니다

이번 전환을 보면서 규제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규칙집에 숫자가 가득 찰수록 안전해진다는 직관은 사실 틀렸습니다. 경비원을 10명 배치했다는 체크박스를 채우는 것과, 그 10명이 실제로 침입을 막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처방형 규제는 최악을 막는 최소 기준을 설정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시설 유형이 다양해지는 환경에서는 오히려 혁신을 가로막고, 규정 준수를 목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성능기반 규제는 그 착각을 걷어냅니다.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달성했느냐'가 기준이 됩니다.

소형모듈원자로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고, 원전의 설계와 운영 방식이 다양해지는 시대에 이 전환이 갖는 의미는 더욱 커집니다. 보안 규제의 틀이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