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8. 08:52ㆍ원자력 뉴스
미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새로 짓는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습니다. "미국은 원전을 짓지 못하게 막아둔 것 아닌가?" 맞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주(州)에서 신규 원전 건설을 사실상 금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 장벽이 하나둘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를 이끄는 것은 놀랍게도 AI 데이터센터입니다. 도대체 데이터센터가 40년 묵은 법률을 어떻게 흔들고 있는 걸까요?
미국의 원전 금지, 연방 정부가 아니라 주 정부의 결정이었다
많은 분들이 '미국의 원전 금지'를 연방 차원의 전면적 규제로 오해하십니다. 실제로는 다릅니다. 미국에서 원전의 건설 허가와 안전 규제는 NRC(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원자력규제위원회)라는 연방기관이 담당합니다. NRC는 원자로 안전심사, 환경심사, 보안 등 공공 안전에 관한 사항을 일괄 관할합니다. 1983년 연방대법원은 Pacific Gas & Electric Co. v. State Energy Resources Conservation & Development Commission 판결에서 방사선 안전 규제는 연방 영역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정부가 경제성이나 전력정책 같은 비안전 사유로 신규 원전 허가를 제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연방법에 의해 자동으로 배척되지 않는다고도 판단했습니다.
바로 이 틈에서 각 주의 '모라토리엄(moratorium)'이 탄생했습니다. 모라토리엄이란 신규 원전 건설 또는 부지 승인을 제한하는 주법·주헌법·허가 요건을 뜻합니다. 제한 방식은 다양합니다. 고준위폐기물(사용후핵연료) 영구 처분 수단이 확인될 때까지 신규 원전 허가를 유예하는 방식, 주의회 승인이나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방식, 특정 지역에서 원전을 금지하거나 신규 원전 자체를 전면 금지하는 방식 등이 있습니다.
이 모라토리엄들은 대부분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형성되었습니다. 1979년 Three Mile Island 사고 이후 대중 신뢰가 크게 흔들렸고, 대형 원전의 건설비 상승과 일정 지연, 전력수요 증가율 둔화, 소비자 요금 부담 우려가 한꺼번에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특히 고준위폐기물 처분 방법이 확인될 때까지 허가를 유예한다는 조건부 모라토리엄은, 연방 영구처분장 계획(Yucca Mountain 프로젝트 등)이 수십 년째 정체되면서 사실상 해제 불가능한 장벽이 되어버렸습니다.
2026년 4월 기준으로 California, Connecticut, Hawaii, Maine, Massachusetts, Minnesota, New York, Oregon, Rhode Island, Vermont 등 10개 주에 여전히 신규 원전 건설 관련 제한이 남아 있습니다.
왜 지금, AI 데이터센터가 변화를 촉발하는가
40년 가까이 굳건하던 장벽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입니다.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전력 수요,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 해외로 나간 제조업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현상), 전기차·열펌프로 대표되는 전력화(electrification) 확산, 그리고 전력 계통 신뢰도 저하에 대한 우려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AI 데이터센터의 비중은 압도적입니다. 대규모 AI 모델 훈련과 추론에 필요한 전력은 24시간, 365일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날씨에 따라 출력이 변동하는 에너지원만으로는 이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원자력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면서도 부하 추종 없이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청정 전원입니다. 이를 'firm power(확정적 공급 전력)'라고 부릅니다.
결과적으로 주 정부들은 새로운 계산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전력 공급이 부족해지면 데이터센터 기업이 다른 주로 떠날 수 있습니다. 일자리와 세수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Wisconsin, Kentucky, Montana, West Virginia에 이어, 최근에는 Illinois와 New Jersey가 모라토리엄 또는 사실상 건설 장벽을 철회·해소했습니다.
Illinois와 New Jersey: 같은 방향, 다른 경로
Illinois와 New Jersey의 사례는 모라토리엄 해제가 단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Illinois는 1980년대 후반부터 대형 원전 신규 건설을 제한해 왔습니다. 변화는 단계적으로 왔습니다. 2023년에 먼저 300 MWe(메가와트 전기) 이하의 SMR(Small Modular Reactor, 소형 모듈 원자로)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었고, 2025년에는 Clean and Reliable Grid Affordability Act(CRGA, 청정·신뢰 계통 요금 안정법)가 통과되어 2026년 1월 주지사가 서명하면서 대형 원전 모라토리엄까지 해소되었습니다. CRGA는 단순히 금지를 없애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청정전력, 자원 적정성, 전력요금 안정 목표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Integrated Resource Planning(통합자원계획) 절차를 함께 도입했습니다. 이어 2026년 2월에는 주지사 행정명령 2026-01이 발표되어 2033년까지 최소 2 GW(기가와트)의 신규 청정 원전 용량 건설 착수 가능성 확보를 주정부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New Jersey의 경로는 달랐습니다. 이 주에서 원전 신규 허가의 장벽은 CAFRA(Coastal Area Facility Review Act, 해안지역시설검토법)라는 법률 체계에 있었습니다. CAFRA는 NRC가 승인한 방사성폐기물 처분 방법을 별도로 요구했는데, 연방 영구처분장 정책이 정체된 상황에서 이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2026년 4월, 주의회는 S3870/A4528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NRC 기준에 부합하는 안전한 방사성폐기물 저장 방식도 허용하도록 요건을 변경했습니다. 법률 언어 하나가 바뀌면서 수십 년의 장벽이 제거된 것입니다. New Jersey 주정부는 Nuclear Task Force(핵에너지 태스크포스)도 출범시켜 금융, 공급망, 기술개발, 인력양성, 규제·인허가, 공공신뢰 분야를 체계적으로 검토하도록 했습니다.
모라토리엄 철회가 원전 건설을 보장하지 않는 이유
모라토리엄이 해제되었다는 소식에 "그러면 이제 원전을 바로 지을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현실은 그보다 복잡합니다.
모라토리엄 철회는 주정부 차원의 사전 법적 장벽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NRC 인허가, 전력구매계약(PPA), 부지 확보, 금융 조달, 지역수용성 논의가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제가 새로운 출발선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NRC의 인허가 절차는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10 CFR Part 50은 건설허가와 운영허가를 2단계로 분리하는 전통적 체계이고, 10 CFR Part 52는 조기부지허가, 설계인증, 통합허가를 묶어 예측가능성을 높인 체계입니다. 어느 경로를 택하든 수년 이상의 심사 기간이 필요합니다.
공급망과 시공 역량도 과제입니다.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신규 원전이 거의 건설되지 않으면서 관련 산업 생태계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SMR이나 선진 원자로의 경우 FOAK(First Of A Kind, 최초로 설계를 적용한 호기) 비용과 일정이 개선되지 않으면 경쟁력 확보가 어렵습니다. 모라토리엄 철회의 효과가 현실화되려면 규제 완화와 동시에 기술 실증, 금융 조달, 수요 확보 전략이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결국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40년 동안 쌓인 장벽은 법 조문 하나를 고치는 것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장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이끄는 것이 AI 데이터센터라는 사실은, 에너지 정책의 지형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신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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