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0. 22:55ㆍ원자력 뉴스
이탈리아가 원자력 법안을 통과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은 분들이 이런 의문을 가지실 겁니다. "원전을 아직 짓지도 않았는데, 무슨 규제기관이 필요한 거지?" 직관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규제기관은 규제할 대상이 있어야 만드는 것 아닌가 싶은 거죠.
그런데 이 순서가 거꾸로 된 것처럼 보이는 전략에는 매우 합리적인 논리가 있습니다. 2026년 5월 현재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이탈리아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이탈리아는 전력을 사 오는 나라입니다. 전력의 약 20%를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수입하며, 이는 세계 2위 전력 순수입국에 해당합니다. 2024년 기준 자국 전력 구성을 보면 천연가스가 44%, 수력 20%, 태양광 13% 순이고, 원자력은 0%입니다.
이탈리아가 원전을 포기한 것은 1987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치러진 국민투표의 결과였습니다. 그 한 번의 선택이 40년 가까이 이탈리아의 에너지 지형을 결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2025년 10월, 멜로니 내각이 각료회의에서 '국가 지속가능 핵프로그램 추진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2026년 5월 19~20일,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은 상원 연설에서 이 법안이 "여름 전 의회에서 통과될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45년 만의 원전 복귀가 법제화 직전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법안 안에 무엇이 담겨 있나
이 법안은 네 가지 핵심 조항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SMR(소형모듈원자로)과 핵융합 기술 개발 권한을 EU 탈탄소 목표 안에서 부여합니다. 둘째, 신규 핵안전 규제청을 설립합니다. 이탈리아판 NRC(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연구·교육·훈련을 강화합니다. 넷째, 부지 선정 시 지역 주민의 참여와 보상을 보장합니다.
그리고 법안 통과 후 12개월 이내에 시행령을 제정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행 일정을 법에 못 박은 것입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두 번째 조항, 즉 규제청 신설입니다. 이탈리아에는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이 한 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법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프라 중 하나로 규제청 설립을 명시했을까요.
규제기관 없이는 첫 삽도 못 뜬다
원자력 발전소는 규제기관의 허가 없이는 착공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기본 요건이기도 하고, 실제 사업을 진행하는 측면에서도 피할 수 없는 구조적 현실입니다.
원전 건설 허가를 내주고, 안전 기준을 검토하고, 운영 허가를 발급하는 기관이 없다면, 어떤 사업자도 이탈리아에 원전을 지을 수 없습니다. 허가를 받을 기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가 아무리 "우리 원전 지을게요"라고 선언해도, 규제기관이 없으면 그 선언은 이행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논리가 선명해집니다. 규제기관을 먼저 세워야, 허가 신청을 받을 창구가 생기고, 그때야 비로소 사업자가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할 수 있습니다. 건물을 짓기 전에 건축 허가청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원전이 없는데 규제기관을 먼저 만든다"는 역설처럼 보이는 행동의 실제 논리입니다. 원전이 없기 때문에, 즉 앞으로 지을 계획이기 때문에, 규제기관을 먼저 설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규제 준비에는 왜 시간이 필요한가
규제기관을 법으로 설립한다고 해서 그 기관이 곧바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유능한 규제기관 하나를 만드는 데는 수년이 필요합니다.
원자력 인허가를 심사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마지막 원전은 1990년대 초에 완전 폐쇄됐습니다. 30년 넘는 공백 동안 원자력 규제 전문가 풀은 크게 줄었습니다. 법안에 연구·교육·훈련 강화 조항이 포함된 것도 이 공백을 메우려는 의도입니다.
또한 규제 기준과 절차를 수립해야 합니다. 어떤 안전 기준을 적용할 것인지, 어떤 절차로 허가를 심사할 것인지, 국제 기준을 어떻게 이탈리아 법체계에 반영할 것인지를 모두 문서화해야 합니다. 이 작업만 해도 수년이 걸립니다.
이탈리아 법안이 통과 후 12개월 내 시행령 제정을 의무화한 것은 이 준비 작업을 강제로 빠르게 진행하겠다는 신호입니다. 법안이 통과되는 시점부터 시계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편, EU의 SMR 전략(COM/2026/117, 2026년 3월)이 2030년대 초 첫 SMR 가동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도 이탈리아의 시간 감각을 설명합니다. 2030년대 초에 이탈리아가 SMR 도입 대열에 합류하려면, 지금부터 규제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규제청 설립, 인력 양성, 기준 수립, 부지 선정, 허가 심사, 착공—이 일련의 과정을 역산하면 현재 시점에 규제기관을 만들기 시작해야 2030년대 배치 일정에 맞출 수 있습니다.
기술 역량은 이미 있다
이탈리아의 이 전략이 허황된 선언에 그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기존 원전 역량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앤살도 뉴클레아레(Ansaldo Nucleare)는 이탈리아 원전 기술의 명맥을 유지해 온 기업입니다. 원전 폐쇄 이후에도 해외 원전 사업에 참여하며 기술력을 보존해 왔습니다. 에넬(Enel) 등 대형 유틸리티도 원전 관련 인력과 기술 역량을 일부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이탈리아는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은 남아 있습니다. 규제 기반이 만들어지면 그 씨앗을 키울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집니다.
제도 선제 구축이 보내는 신호
규제기관을 먼저 만든다는 결정은 단순히 행정 절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외부를 향한 신호이기도 합니다.
원전 사업자와 기술 공급자, 그리고 금융 투자자들은 규제 환경의 안정성을 보고 움직입니다. 규제기관이 없는 나라에 수조 원짜리 원전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사업자는 없습니다. 반면 규제 체계가 갖춰지기 시작하면, Westinghouse나 EDF, Rolls-Royce SMR 같은 공급자들이 이탈리아 시장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투자자들도 리스크를 계산할 수 있는 근거가 생깁니다.
마타렐라 대통령의 "여름 전 의회 통과" 발언은 단순한 일정 공지가 아닙니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국제 무대를 향해 "이탈리아는 진지하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40년 공백을 건너는 방법
국민투표 한 번이 한 나라의 에너지 선택지를 40년 동안 닫아 두었습니다. 그 선택의 무게는 지금 이탈리아가 치르는 비용—전력 수입 의존, 높은 전기요금, 탄소 목표 달성의 어려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가 이제 그 공백을 메우려 할 때, 선택한 방법이 "제도부터"입니다. 기술과 자금을 먼저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 기반과 인력 기반을 먼저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전 재도입이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라 수십 년짜리 국가 에너지 전략임을 이탈리아가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원전 없는 나라가 규제기관을 먼저 세우는 것—그것은 역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전을 진짜로 짓겠다는 가장 합리적인 첫 번째 행동입니다. 법안이 여름 전 통과된다면, 이탈리아는 그 첫 번째 행동을 공식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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