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8. 05:05ㆍ원자력 뉴스
원자력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 중 하나는 '사용후핵연료를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원자로에서 꺼낸 뒤에도 강한 방사선을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방출하는 이 연료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안전한 최종 처리 방법조차 합의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2026년 5월, 미국에서 그 답을 다시 찾겠다는 움직임이 공식화됐습니다. 약 50년 동안 잠겨 있던 기술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카터 대통령이 금지한 것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행정명령 하나로 미국의 핵연료 재처리(reprocessing)를 금지했습니다. 재처리란 사용후핵연료에 남아 있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화학적으로 분리해 새 연료로 다시 사용하는 기술입니다. 프랑스, 영국, 일본은 이 기술을 상업화했지만 미국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카터의 결단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재처리 과정에서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이 분리되기 때문에, 이 기술이 확산되면 핵무기 제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핵 비확산(nonproliferation) 논리입니다. 이후 레이건·클린턴·오바마 행정부를 거치는 동안 이 금지 방침은 사실상 유지되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사용후핵연료는 재처리 없이 그대로 쌓여왔습니다. 현재 미국 전역 73개 부지에 약 95,000 메트릭톤의 사용후핵연료가 임시 보관 중이며, 매년 약 2,000톤씩 추가됩니다.
파이로프로세싱, 이번엔 다른 방식
2026년 5월 18일, 뉴욕 기반 스타트업 BLSK Energy가 Argonne 국립연구소(ANL)와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 기술의 상업화를 위한 협력 연구개발 협약(CRADA)을 체결했습니다.
파이로프로세싱은 기존의 재처리 방식과 다릅니다. 전통적 재처리(PUREX 공정)는 수용액을 사용해 플루토늄을 순수하게 분리합니다. 이것이 핵무기 전용 가능성이 높은 이유입니다. 반면 파이로프로세싱은 고온 전기화학적 공정, 쉽게 말하면 용융염 속에서 전기로 원소를 분리하는 방법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플루토늄만 따로 빼내는 것이 화학적으로 훨씬 어렵고, 나오는 결과물도 여러 금속이 섞인 합금 형태입니다. 핵 비확산 측면에서 기존 재처리보다 저항성이 높다는 것이 ANL의 수십 년 연구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BLSK가 ANL로부터 확보한 것은 이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의 독점 실시권, ANL 핵연료 재처리 전문가 팀에 대한 접근권, 그리고 관련 실험 설비입니다. 2034년 파일럿 재처리 시설 운영 개시를 첫 목표로 잡았습니다.
HALEU와 선진원자로, 연결고리
이 기술이 왜 지금 다시 주목받는지 이해하려면 HALEU라는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HALEU는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High-Assay Low-Enriched Uranium)의 약자로, 농축도 20% 미만의 우라늄을 말합니다. 일반 원전에 쓰이는 연료(농축도 약 3~5%)보다 훨씬 높지만, 핵무기에 쓰이는 고농축 우라늄(90% 이상)보다는 낮습니다.
TerraPower의 Natrium 원자로, Oklo의 마이크로리액터, Versatile Test Reactor — 미국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차세대 원자로들은 상당수가 HALEU 연료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현재 미국에는 HALEU를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시설이 없습니다. 러시아가 사실상 유일한 공급원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그 경로도 불안해졌습니다. 이것이 HALEU 공급 병목입니다.
파이로프로세싱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사용후핵연료를 파이로프로세싱으로 처리하면 HALEU급 금속 연료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쓰레기 더미에서 미래 원자로의 연료를 뽑아낸다는 개념입니다. 현재 하루 약 200만 달러 규모의 보관 비용이 드는 95,000톤의 사용후핵연료가 에너지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정책의 전환
이번 협약이 단순한 스타트업 발표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정책적 배경 때문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5월 행정명령을 통해 에너지부 장관에게 사용후핵연료 관리 및 선진 핵연료 사이클 전개에 관한 국가 정책 권고안 제출을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DOE는 2026년 4월 민간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재활용 시범사업 제안요청서(RFA)를 두 건 발표했습니다.
BLSK의 등장은 이 정책 방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McKinsey & Company가 2026년 5월 '국내 핵연료 생산 옵션 분석' 보고서에서 파이로프로세싱의 경제성을 지지했다는 것도 산업적 신뢰를 높이는 신호입니다.
50년 전 카터 대통령이 닫은 문이 지금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기술도 달라졌고, 지정학도 달라졌으며, 에너지 수요도 달라졌습니다. 이 문이 실제로 얼마나 열릴지는 2034년 파일럿 시설 결과를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금지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만큼은 분명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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