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9. 23:13ㆍ원자력 뉴스
"원자력은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닌가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세계 곳곳에서 원전을 줄이거나 폐쇄하는 결정들이 이어지면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2026년 5월 마지막 주, 전혀 다른 신호들이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군용 핵추진이 민간 전력으로, 소형 원자로(SMR)가 글로벌 공급망으로, 바다 위의 원전이 상업 경쟁으로 — 그것도 한꺼번에. 이번 원자력의 귀환이 과거와 무엇이 다른지, 다섯 가지 신호를 차례로 짚어보겠습니다.
신호 1 — 항공모함이 육지에 전기를 보낸다: 군 핵추진의 민간화
미 해군이 올여름 USS 제럴드 R. 포드(Gerald R. Ford) 핵항공모함의 원자로 전력을 노퍽 해군기지(세계 최대 해군기지)에 직접 공급하는 시험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핵추진 함선이 전력을 육상 시설에 보내는 것은 세계 최초의 시도입니다.
포드함에는 A1B 원자로 2기가 탑재돼 있습니다. 기존 항모에 달려 있던 A4W 원자로보다 약 25% 더 많은 전력을 만들어 내는 설계입니다. 기술적 도전은 함선의 발전 시스템을 육상 전력망의 전압·주파수에 맞춰 변환하는 것인데, 이것이 성공하면 "이동식 핵발전소"라는 개념이 현실이 됩니다.
이 시험이 단순한 기술 실험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 의회는 FY2027 국방수권법(NDAA, 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에 해군 원자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적극 추진 중입니다. 이미 육군과 공군의 소형 원자로 파일럿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해군까지 합류하면 군 3군 원자로 프로그램이 완성됩니다. 군의 수요가 소형 원자로 시장의 초기 수요를 만들고, 그 기반 위에서 민간 상업 시장이 열리는 구조입니다.
신호 2 — 한국과 체코가 영국 소형 원전 심장을 만든다: SMR 공급망 재편
소형 모듈 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는 기존 대형 원전을 소형화하고, 공장에서 90%를 완성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입니다. 건설 기간과 비용 리스크를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점이 핵심 장점입니다.
영국의 롤스로이스 SMR(Rolls-Royce SMR)이 470MWe 설계의 핵심 부품, 그 중에서도 원자로 압력 용기(RPV, Reactor Pressure Vessel — 핵연료가 들어 있는 원자로의 핵심 용기)를 만들 공급사로 한국 두산에너빌리티와 체코 Škoda JS를 동시에 선정했습니다.
이 '이중 공급(dual-supply)' 구조는 의미심장합니다. 한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두 공급사가 함께 납품 안정성을 보장하는 방식인데, 두산에너빌리티는 창원 본사에 SMR 전용 공장 건설까지 추진하고 있습니다. 롤스로이스 SMR의 공급망 이사 루스 토드(Ruth Todd)는
"이 두 회사의 이중 공급 접근 방식이 공급망을 강화하고 납품 확실성을 보장한다. 두 회사 모두 전 세계 가동·건설 중인 원전의 핵심 부품을 공급한 탁월한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고 밝혔습니다. 이 결정의 배경에는 영국 Wylfa와 체코 Temelín이라는 두 개의 실제 건설 예정 부지가 있습니다. 설계도 단계의 이야기가 아닌, 공급 계약이 체결되고 공장이 짓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신호 3 — 바다 위를 떠다니는 원전, 직렬 생산에 들어가다: 부유식 원전 상업화
부유식 원전(FNPP, Floating Nuclear Power Plant)은 원자로를 바지선(barge) 위에 얹어 바다에 띄우는 방식입니다. 해안이나 섬처럼 전력망이 닿지 않는 곳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고, 육지 부지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러시아 Rosatom이 2세대 부유식 원전용 차세대 소형 원자로 RITM-200S 1호기를 완성하고 조선소로 보냈습니다. 이 원자로 2기를 탑재한 FPU-106은 106MWe를 발전하며, 현재 4기가 동시에 건조 중입니다. 목적지는 러시아 추쿠카 자치구의 바임스키(Baimsky) 동광 단지 — 광산 채굴에 부유식 원전을 쓰는 세계 최초의 사례입니다.
러시아는 이미 2019년부터 세계 최초의 상업용 부유식 원전 '아카데믹 로모노소프(Akademik Lomonosov)'를 운영 중입니다. 이번 RITM-200S는 그 후속 세대로, 발전 용량이 50% 이상 늘어났습니다.
서방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같은 날, 그리스에서는 부유식 원전 타당성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그리스 정책연구소·CORE POWER·ABS(선급 기관) 공동 연구 결과는 명확합니다: "근본적 기술 장벽 없음." 도전 과제는 기술이 아니라 정책과 규제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수천 개의 섬에 디젤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그리스에서, 2035~2040년 내 부유식 원전 배치가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신호 4 — 건설 현장이 인재 양성소가 됐다: 영국 Hinkley Point C의 축적
영국 서머싯(Somerset)의 Hinkley Point C(HPC) 원전은 2030년 상업 운전을 목표로 건설 최고조에 있습니다. 1,630MWe EPR(유럽형 가압수형 원자로) 2기로 구성되며, 완공 시 영국 전력 수요의 약 10%를 80년간 공급하는 규모입니다.
공기 지연과 비용 초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초 2025년 완공 목표가 2030년으로 밀렸고, 건설비도 당초 예상보다 약 31%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건설 현장이 만들어낸 다른 숫자가 있습니다: 1만 9500명에게 기술 훈련을 제공하고, 1,740명의 견습생을 배출했습니다. 당초 목표 1,000명의 174%입니다. 70가지 견습 유형이 운영됐고, 견습생의 70%가 영국 남서부 지역 출신입니다.
EDF의 2026년 보고서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현재 HPC는 건설 최고조에 있으며, 막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전력 생산 이상의 광범위한 편익을 영국 국민과 경제에 제공하고 있다."
HPC에서 훈련받은 인력과 구축된 공급망은 이미 다음 원전인 Sizewell C와 Wylfa 롤스로이스 SMR을 위한 준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자력 건설 인프라는 한 번 사라지면 복구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립니다. HPC는 단순한 발전소가 아니라 영국 원자력 산업 재건의 플랫폼입니다.
신호 5 — "폐쇄하기로 했는데..." 탈원전 재검토의 물결
다섯 번째 신호는 숫자나 계약이 아닙니다. 정책의 흔들림입니다.
스페인 알마라즈(Almaraz) 원전은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순차 폐쇄 수순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5년 발생한 이베리아 대정전이 분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대규모 정전은 "전력망 안정성을 누가 책임지는가"라는 질문을 유럽 전체에 던졌고, 유럽의회에서 알마라즈 원전 폐쇄 재고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원자력 안전위원회(CSN)의 연장 허가 심사도 진행 중입니다.
탈원전 정책이 선언됐다고 해서 원전이 곧바로 문을 닫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지역 경제와 일자리를 지탱해 온 발전소를 폐쇄할 때는 현실적인 저항이 따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 에너지 안보라는 변수가 더해졌습니다. 알마라즈의 결정이 스페인 나머지 7기의 향방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번 부흥은 무엇이 다른가
과거 원자력 르네상스 논의는 주로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단일 논리 위에 있었습니다. 2026년의 신호들은 결이 다릅니다. 에너지 안보(군 원자로 파일럿), 공급망 다변화(이중 공급 체계), 해양·원격지 전력(부유식 원전), 인력 인프라 축적(영국 견습생 시스템), 기존 원전 수명 연장(탈원전 재검토) —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 다섯 흐름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번 흐름이 다른 것은 정책 선언이 아니라 계약서와 공장과 훈련받은 사람들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원자력의 귀환이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지금처럼 높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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