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에너빌리티, 유럽 SMR 공급망 핵심 플레이어로 — Rolls-Royce SMR RPV 공급사 선정의 의미

2026. 5. 29. 23:05원자력 뉴스

"한국이 원자력 수출을 한다고 해도,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이 질문은 꽤 합리적입니다. 국가 간 대형 원전 수출은 외교와 금융이 얽힌 장기전이고, 그 과실이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퍼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최근 두산에너빌리티의 행보는 조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국 원전 수출 계약을 기다리는 대신, 이미 진행 중인 글로벌 SMR(소형 모듈 원자로, Small Modular Reactor) 프로젝트의 핵심 부품 공급사로 직접 진입한 것입니다.

RPV가 무엇이기에, 이 선정이 중요한가요?

2026년 5월 28일, 영국 Rolls-Royce SMR이 발표한 소식은 원자력 업계에서 주목받았습니다. 470MWe급 SMR 설계의 핵심 원자력 부문(Nuclear Island) 부품, 그중에서도 원자로 압력용기(RPV, Reactor Pressure Vessel)의 전략 공급사로 체코의 Škoda JS와 한국의 두산에너빌리티를 동시에 선정한 것입니다.

RPV는 원자로의 심장부를 감싸는 두꺼운 금속 용기입니다.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는 노심(Core)과 냉각수가 순환하는 공간 전체를 고온·고압 환경에서 안전하게 담아두는 역할을 합니다. 일반 압력솥과 비교한다면 압력은 수백 배, 두께는 수십 센티미터에 달하며, 원전 전체 수명 동안 교체 없이 버텨야 합니다. 제조 난도가 극히 높은 만큼, 이 부품을 만들 수 있는 기업은 전 세계에 손에 꼽힙니다.

Rolls-Royce SMR 운영·공급망 이사 Ruth Todd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 두 회사의 이중 공급(dual-supply) 접근 방식이 공급망을 강화하고 납품 확실성을 보장한다. 두 회사 모두 전 세계 가동·건설 중인 원전의 핵심 부품을 공급한 탁월한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단순히 가격 경쟁으로 따낸 납품 계약이 아닙니다. Rolls-Royce SMR이 리스크 분산을 위해 두 개의 신뢰할 수 있는 제조사를 전략적으로 선정한 것이고, 두산에너빌리티는 그 기준을 통과했습니다.

'수출'이 아니라 '공급망'으로 — 전략의 전환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원자력 산업의 국제화 경로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접근 방식은 명확했습니다. 한국이 설계한 APR1400 원자로를 통째로 수출하는 것, UAE 바라카 원전이 그 대표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 경로는 오랜 외교 교섭과 수십 년 단위의 프로젝트 관리를 요구합니다. 수주와 수익 실현 사이의 시간이 매우 깁니다.

반면 두산에너빌리티가 이번에 선택된 포지션은 다릅니다. 영국이 설계한 Rolls-Royce SMR에 한국이 만든 핵심 부품을 납품하는 것입니다. 설계 주권은 영국에 있지만, 제조 역량은 한국에서 인정받은 셈입니다. 이것은 글로벌 SMR 공급망(supply chain)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전략으로, 훨씬 더 빠른 매출 실현이 가능합니다.

이번 협력의 대상 프로젝트는 영국 Wylfa 부지와 체코 Temelín 부지입니다. Rolls-Royce SMR은 2026년 4월 영국 국영 원자력 기관 GBE-N과 Wylfa 부지 3기 설계 작업 계약을 체결했고, 체코에서는 국영 에너지기업 ČEZ와 조기 공사 계약을 맺고 인허가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두 프로젝트 모두 2030년대 착공을 향해 움직이고 있으며, 두산에너빌리티는 지금부터 사전 생산 작업(설계 확정·제조 준비·조기 공급사 참여)을 맡습니다.

창원 SMR 전문공장, 왜 지금 짓는가

두산에너빌리티는 현재 창원 본사에 SMR 전문 생산동 구축을 추진 중입니다. 그리고 PM-HIP(분말야금-열간등압성형, Powder Metallurgy Hot Isostatic Pressing) 기술을 SMR 장비 제조에 적용하는 역량 강화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PM-HIP는 금속 분말을 고온·고압으로 압착해 복잡한 형상의 대형 부품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기존의 단조(forging) 방식과 비교하면 재료 낭비가 적고, 균일한 품질을 내기 유리합니다. SMR은 대형 원전보다 부품의 규격과 수량이 표준화·모듈화되어 있어, 이 기술과의 궁합이 특히 좋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사업부 김종두 사업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협력이 글로벌 SMR 공급망에서 역할을 확장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며, 원자력 주기기 제조 경험·기술을 바탕으로 Rolls-Royce SMR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할 것이다."

 

Rolls-Royce SMR의 설계적 특징도 여기서 중요한 맥락을 제공합니다. 이 설계는 SMR의 약 90%를 공장에서 제조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입니다. 현장 공사 비중을 줄여 공기(工期)와 비용 리스크를 낮추는 것이 핵심 경쟁력이고, 이는 고품질 공장 제조 역량을 가진 공급사의 위상을 높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창원 전문공장 투자는 바로 이 구조 위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이중 공급 구조가 뜻하는 것

Rolls-Royce SMR이 Škoda JS(체코)와 두산에너빌리티(한국)를 동시에 선정한 구조는 단순히 물량 분산이 아닙니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제조 기반을 확보함으로써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비하고, 납품 일정의 신뢰성을 높이는 전략입니다.

Škoda JS의 경우 모회사 ČEZ가 Rolls-Royce SMR 지분 약 20%를 보유하고 있어 체코 프로젝트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영국 Wylfa 프로젝트를 포함한 글로벌 플릿 전체의 공급 파트너로 기능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앞으로 Rolls-Royce SMR이 글로벌 복제(fleet rollout)를 본격화할 경우, 각 부지마다 RPV와 핵심 부품 수요가 따라옵니다. 처음 두 부지에서 공급 실적을 쌓은 기업이 후속 부지에서도 우선적인 위치를 갖게 됩니다. 이번 선정은 단일 계약이 아니라 글로벌 SMR 플릿의 진입 티켓에 가깝습니다.

SMR 시대, 한국 원자력 산업의 포지션

이번 뉴스를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더 넓은 흐름이 보입니다. 글로벌 SMR 시장은 단일 국가의 원전 수출 경쟁이 아니라, 다국적 공급망이 협력하는 생태계로 형성되고 있습니다. 설계는 영국, 제조는 한국과 체코, 부지는 영국·체코·폴란드·캐나다로 분산될 수 있습니다.

이 구조에서 한국 원자력 중공업의 경쟁력은 '통째로 수출할 수 있는 설계'가 아니라 '어떤 설계에도 들어갈 수 있는 제조 역량'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이번 행보는 그 방향을 선택한 첫 번째 공식적인 이정표입니다.

Rolls-Royce SMR Wylfa 프로젝트의 허가 신청 일정, 체코 Temelín의 인허가 착수 시점, 그리고 두산에너빌리티 창원 SMR 공장의 완공 시점이 앞으로 주목해야 할 구체적인 기준점들입니다.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오늘의 선정이 실제 매출과 기술 역량으로 전환되는 그림이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