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가 없을 때, 누가 먼저 '표준'을 만드는가

2026. 6. 13. 02:58원자력 뉴스

새로운 분야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분들이 자주 마주치는 고민이 있습니다. "아직 이 분야는 규칙이 명확하지 않은데, 지금 뛰어드는 게 맞을까?" 규제나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영역은 위험해 보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가장 큰 기회의 창이기도 합니다. 최근 미국 테네시주에서 일어난 핵융합 규제 사례는 이 질문에 흥미로운 답을 보여줍니다. 연방 정부도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영역에서, 한 주(州) 정부가 먼저 규칙을 만들어 '허브'라는 이름표를 선점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AI 도구나 자동화 트렌드 속에서 1인 기업가가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도 함께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도 규칙을 안 만들었을 때, 테네시는 무엇을 했나

핵융합(Fusion)은 태양이 에너지를 만드는 방식과 같은 원리로, 가벼운 원자핵을 결합시켜 막대한 에너지를 얻는 기술입니다. 문제는 이 기술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인허가할 것인가가 오랫동안 불분명했다는 점입니다. 핵융합 발전소는 기존의 원자력발전소(핵분열을 이용하는 시설)와는 작동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미국의 원자력 규제 기관인 NRC(Nuclear Regulatory Commission)는 2023년에 핵융합 기계를 원전과 같은 '사용화 시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벼운 규제 체계인 "부산물 물질(byproduct materials)" 규제로 다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의 핵심은 따로 있습니다. NRC가 핵융합 인허가의 상당 부분을 각 주(Agreement State, NRC와 협약을 맺고 일부 핵물질 규제 권한을 위임받은 주)가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즉, 연방 차원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완성된 매뉴얼을 내려주는 대신, "각 주가 알아서 구체적인 규칙을 만들어도 된다"는 빈 공간을 남겨둔 셈입니다.

이 빈 공간을 가장 먼저 채운 곳이 테네시였습니다. 2026년 6월 9일, 테네시주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주 차원의 핵융합 기계 독자 규제 프레임워크를 발효시켰습니다. 테네시 환경보전부(TDEC)가 내놓은 이 규정은 기술 중립적(technology-neutral) 접근을 택했는데, 이는 특정 핵융합 기술 방식을 정해두지 않고 "원자핵 변환과 에너지·열·방사선 포착이 가능한 모든 시스템"을 폭넓게 "핵융합 기계"로 정의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회사가 어떤 방식의 핵융합 기술을 들고 오더라도 적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통 언어를 먼저 만든 것입니다.

규칙을 먼저 만든 사람이 '허브'가 된다

규칙이 생기자, 그 규칙을 적용받을 첫 번째 사례도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테네시 오크리지 인근에서 핵융합 상용 시설을 개발 중인 Type One Energy가 새 프레임워크 하에 최초 인허가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 회사가 계획 중인 "Infinity Two"는 400MWe(메가와트, 약 40만 가구가 동시에 쓸 수 있는 전력 규모) 규모의 스텔러레이터(Stellarator) 방식 핵융합 발전소로,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RNL), 테네시밸리전력청(TVA), 테네시대학교와 협력하는 융합 개발 캠퍼스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Type One은 이미 2026년 1월 TDEC에 면허 신청서를 제출했고, 새 규제 하에서 건설은 2028년 착수가 목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테네시 환경보전부 위원장 David Salyers의 발언입니다. 그는 이 규제 발효에 대해 "테네시는 원자력 산업 성장에서 미국 1위 주로 선정됐으며, 이번 조치는 핵융합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서의 명성을 더욱 강화한다"고 평가했습니다.

"테네시는 원자력 산업 성장에서 미국 1위 주로 선정됐으며, 이번 조치는 핵융합 혁신의 글로벌 허브로서의 명성을 더욱 강화한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전략의 본질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테네시가 핵융합 기술 자체를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진보된 핵융합 연구를 하는 곳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핵융합 허브"라는 이미지를 가장 먼저 가져갈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도 만들지 않았던 규칙을 가장 먼저 만들고 발효시켰기 때문입니다. 업계 관계자의 반응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핵융합 기업 Xcimer Energy의 공동창업자 Alexander Valys는 "NRC가 핵융합 인허가를 Agreement State로 이양한 결정이 업계의 큰 승리"라며, 기업들이 파일럿 플랜트 건설 부지를 선택할 때 각 주의 규제 혜택을 비교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다시 말해, 규제 명확성 자체가 핵융합 스타트업들의 부지 선택 기준이 되었고, 그 명확성을 가장 먼저 제공한 테네시가 자동으로 후보지 목록의 맨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규칙을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규칙을 따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곳으로 모으는 효과를 낳은 셈입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최초로 체계를 제시하는 사람'이 갖는 힘

이 사례를 1인 기업가나 개인 브랜드의 관점으로 옮겨보면 어떨까요. AI 도구나 자동화 트렌드처럼 매일같이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분야에서는, 아직 누구도 "이렇게 하는 게 정답"이라고 정리해주지 않은 영역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테네시가 보여준 전략의 핵심은 결국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기술 중립적인 틀을 먼저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테네시의 규제는 특정 핵융합 기술 하나만을 위한 규칙이 아니라, 어떤 방식의 핵융합 기술이 와도 적용 가능한 공통 기준이었습니다. 새로운 AI 도구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도구 하나의 사용법만 설명하는 것보다, "이런 종류의 작업에는 이런 기준으로 도구를 선택하고, 이렇게 검증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틀을 먼저 제시하는 쪽이,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개별 도구들에 대한 설명까지 자연스럽게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둘째, 불확실성 자체를 해소해주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핵융합 기업들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기술이 아니라 "어디서, 어떤 규칙으로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불확실성이었습니다. 테네시는 그 불확실성을 가장 먼저 줄여준 곳이 되면서 신뢰를 얻었습니다. AI 자동화 트렌드에서도 사람들이 진짜로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종종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이걸 어떤 순서로, 어떤 기준으로 도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입니다. 그 막막함에 대해 가장 먼저, 가장 명확하게 체계를 정리해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해당 분야의 '허브'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둘 부분이 있습니다. 테네시의 사례가 성공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먼저 발표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테네시는 이미 TVA의 대규모 원자력 인프라와 60년 이상의 핵 관련 프로그램 규제 경험을 보유한 지역이었습니다. 즉, 먼저 깃발을 꽂는 행동이 신뢰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깃발을 꽂을 만한 기존의 기반과 경험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1인 브랜드의 경우에도, 단순히 "제가 처음으로 정리했습니다"라는 선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분야에 대해 꾸준히 다뤄온 이력이나, 실제로 검증해본 경험이 뒷받침될 때 그 '최초 발표'가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규칙의 빈자리를 먼저 메우는 전략

테네시의 핵융합 규제 사례는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됩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아직 아무도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 빈자리는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게 마련이고, 가장 먼저 그 자리를 채운 쪽이 해당 분야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테네시-Type One Energy-TVA-ORNL로 이어지는 협력 구조가 앞으로 핵융합 산업 생태계의 지리적 허브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도, 결국 이 '선점'에서 출발했습니다.

AI 도구와 자동화 트렌드처럼 변화의 속도가 빠른 영역에서는, 완벽하게 정리된 기준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누군가가 먼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기술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에 실제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여기서는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면 됩니다"라는 정리된 체계를 가장 먼저, 가장 명료하게 제시하는 일입니다. 다음에 새로운 트렌드를 마주할 때, "누가 먼저 규칙을 정리해줄까"라는 질문을 떠올려 보신다면, 그 답이 자신이 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도 함께 보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