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유산 5,600만 갤런: 핸퍼드 방사성 폐기물 정화 사업의 현재

2026. 6. 29. 23:05원자력 뉴스

방사성 폐기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분들이 어디엔가 봉인된 채 영원히 손댈 수 없는 위험물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수십 년에 걸쳐 이 폐기물을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국가 단위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현장이 바로 워싱턴주의 핸퍼드(Hanford) 사이트입니다.


냉전이 남긴 숙제, 5,600만 갤런

핸퍼드 사이트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부터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가동되었습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과 이후 미국 핵무기 프로그램에 쓰인 플루토늄 상당량이 이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수십 년간의 핵물질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방사성 액체 폐기물은 지하 탱크에 저장되었고, 그 총량은 현재 약 5,600만 갤런(약 2억 1,200만 리터)에 달합니다.

이 수치가 실감이 잘 안 된다면 올림픽 규격 수영장(약 2,500㎥)으로 환산해 보겠습니다. 5,600만 갤런은 수영장 약 85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양입니다. 그리고 이 액체 안에는 세슘-137, 스트론튬-90, 테크네튬-99 등 반감기가 수십 년에서 수십만 년에 이르는 방사성 핵종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양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폐기물은 강산성 또는 강알칼리성을 띠며 고방사성이기 때문에, 사람이 직접 접근해 작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모든 분석과 처리는 원격 취급(remote handling) 기술과 특수 실험실 인프라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222-S 연구소: 정화의 눈과 귀

폐기물 정화 사업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탱크 안에 정확히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어떤 핵종이 얼마나 있는지, 화학적 성질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처리 방법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핸퍼드 사이트 200 West Area에 위치한 222-S 연구소입니다.

222-S 연구소는 고방사성 샘플 분석을 위한 사이트 내 1차 분석 실험실로, 미국 에너지부(DOE)의 위험 범주 3(Hazard Category 3) 핵 시설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위험 범주 3은 사고 발생 시 시설 부지 경계 밖에 중대한 방사선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없는 수준으로, 국제 기준으로도 엄격히 관리되는 등급입니다.

이 연구소에서 수행되는 분석 결과는 핸퍼드 사이트 전체의 탱크 폐기물 저장·처리 계획에 직접 반영됩니다. 한 마디로, 222-S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5,600만 갤런 전체의 처리 일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2026년 6월 25일, 미국 에너지부 환경관리실(DOE-EM, Office of Environmental Management)은 이 222-S 연구소 운영 계약에 대한 초안 입찰요청서(Draft RFP)를 공개했습니다. 이해관계자는 2026년 7월 31일까지 의견을 제출할 수 있으며, DOE-EM은 FY2027 1분기(2026년 10월~12월)에 최종 입찰요청서를 발행할 계획입니다.


연간 30억 달러: 정화 사업의 규모와 시장

DOE-EM은 미국 내 핵무기 프로그램으로 오염된 부지 정화를 전담하는 조직으로, 연간 정화 예산이 약 30억 달러(약 4조 원)에 달합니다. 이 중 상당 부분이 핸퍼드 사이트에 집중됩니다. 단일 환경 정화 프로젝트로는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입니다.

이번 222-S 연구소 계약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소규모 기업 경쟁 전용(Total Small Business Set-Aside) 조건입니다. 일반적으로 핵 분야 대형 계약은 Bechtel, AECOM 같은 대형 방산·엔지니어링 기업이 장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계약은 명시적으로 대형 기업 참여를 배제하고, 방사화학 분석·핵 계측 등 전문 소규모 서비스 기업에게만 기회를 열어두었습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소규모 핵 서비스 산업을 육성하려는 정책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핸퍼드 정화 사업은 수십 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단순히 폐기물을 꺼내 어딘가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준위·고준위 폐기물을 분리하고, 고준위 폐기물은 유리화(vitrification) 공정을 거쳐 유리 블록으로 고화(固化)한 뒤 영구 처분장에 보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이 모든 의사결정의 기초 데이터를 제공하는 곳이 222-S 연구소라는 점에서, 이 계약은 단순한 분석 서비스 계약 그 이상의 전략적 의미를 갖습니다.

DOE-EM은 이번 발표와 함께 핵폐기물 격리 시험 시설(WIPP, Waste Isolation Pilot Plant) 모니터링 보조금도 별도로 발표했습니다. WIPP는 뉴멕시코주 지하 650미터에 위치한 미국 유일의 심지층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으로, 핸퍼드를 비롯한 각지의 방어용 고준위 폐기물이 최종 이송되는 곳입니다.


방사성 폐기물 문제는 과거 핵 활동의 결과를 다음 세대에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와 기술력의 문제입니다. 핸퍼드 사이트의 5,600만 갤런은 한 세대 만에 해결될 수 없지만, 222-S 연구소처럼 과학적 분석을 통해 매 단계 확인하며 나아가는 방식이 현재 인류가 가진 가장 책임감 있는 접근법입니다. 이 사업의 진행 상황을 눈여겨본다면, 원자력 후단(back-end) 기술과 시장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성장할지 가늠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