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로가 수소를 만든다: 인도 IGCAR의 세계 최초 원자력 공정열 수소 생산 실증

2026. 6. 29. 22:57원자력 뉴스

"원자력은 결국 전기 만드는 기계 아닌가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은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맞았습니다. 그러나 2026년 6월 26일을 기점으로 그 답이 달라졌습니다. 인도 타밀나두주 칼팍캄(Kalpakkam)에 위치한 인디라 간디 원자력연구원(IGCAR, Indira Gandhi Centre for Atomic Research)이 세계 최초로 원자로의 열을 직접 사용해 수소를 생산하는 시설을 개소했습니다. 전기를 거치지 않고, 원자로 열 그 자체로 물을 쪼개어 수소를 얻어낸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이 기술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Cu-Cl 열화학 사이클: 전기 없이 열로 물을 분해한다

수소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익숙한 방식은 전기 분해(electrolysis)입니다. 물에 전기를 흘려보내 수소(H₂)와 산소(O₂)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사용하면 온실가스 배출이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기 생산 → 전기 분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에너지 손실이 발생합니다.

IGCAR이 적용한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Cu-Cl 열화학 사이클(Copper-Chlorine thermochemical cycle)은 구리(Cu)와 염소(Cl) 화합물을 매개로 여러 화학 반응 단계를 거쳐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해합니다. 핵심은 이 반응들이 약 500°C 이상의 고온 열만으로 구동된다는 점입니다. 전기를 별도로 쓰지 않기 때문에 전기 변환 손실이 원천적으로 없습니다. 구리와 염소 화합물은 반응 후 재생·순환되므로 소모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500°C 이상의 열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IGCAR이 40년 넘게 운영해온 고속증식시험로(FBTR, Fast Breeder Test Reactor)입니다. FBTR은 나트륨 냉각재를 사용하는 고속 원자로로, 기존 경수로보다 훨씬 높은 온도의 공정열(process heat)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공정열이란 전기 생산이 아닌 산업 공정에 직접 투입하는 열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IGCAR은 이 공정열을 Cu-Cl 사이클에 직결하여 수소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술 개발은 IGCAR과 바바 원자력연구소(BARC, Bhabha Atomic Research Centre)가 공동으로 수행했습니다. 수년간의 연구·공정 개발·엔지니어링·제작·설치·시험 과정을 거쳐 완성된 이 시설은 현재 기술 실증로(technology demonstrator)로 운영되며, 향후 상업 규모 확장을 위한 운전 데이터와 공정 최적화 연구에 활용됩니다.


왜 이것이 패러다임 전환인가: 원전의 역할이 바뀐다

원자력 발전소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오랫동안 "전기 생산 시설"이었습니다. 핵분열 에너지로 증기를 만들고,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IGCAR의 실증은 이 정의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원자로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전기뿐 아니라 열 자체입니다. 이 열을 수소 생산에 직접 투입할 수 있다면, 원자력 발전소는 전기·열·수소를 동시에 공급하는 복합 에너지 플랫폼이 됩니다.

이는 인도의 에너지 전략과도 정밀하게 맞물립니다. 인도 정부는 국가 그린 수소 미션(NGHM, National Green Hydrogen Mission)을 통해 2030년까지 그린 수소 생산 500만 톤(5 MMT)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FBTR 기반 수소 생산 시설은 이 목표에 원자력의 기여를 공식적으로 연결한 첫 번째 사례입니다. 인도 원자력부(DAE) 장관 겸 원자력위원회(AEC) 위원장 Ajit Kumar Mohanty가 직접 개소식을 주재한 것도 이 시설이 갖는 정책적 상징성을 방증합니다.

기술적 확장성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Cu-Cl 열화학 공정이 요구하는 500°C 이상의 고온 열은 FBTR 같은 고속로뿐 아니라, 고온가스로(HTGR, High-Temperature Gas-cooled Reactor)나 용융염로(MSR, Molten Salt Reactor) 같은 차세대 원자로와도 연계할 수 있습니다. 소형모듈원자로(SMR) 설계에서도 Cu-Cl 공정이 기준 기술로 채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증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이 모든 연계 가능성에 대한 기술적 타당성을 확인해준 것입니다.


한국과의 연결점: 남의 일이 아닌 이유

인도 칼팍캄의 소식이 국내와 무관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증 성공은 한국 원자력 R&D 방향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한국은 현재 HTGR(고온가스로)과 수소 생산을 연계하는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고온가스로에서 나오는 고온 공정열을 Cu-Cl 열화학 사이클에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이미 검토 단계에 있습니다. IGCAR의 실증은 이 개념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보여준 증거가 됩니다. 연구 방향의 타당성을 확인받은 셈입니다.

인도 원전 시장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IGCAR의 FBTR은 인도 3단계 핵연료 주기 전략—가압중수로(PHWR) → 고속증식로(FBR) → 토륨로—의 두 번째 단계를 담당하는 핵심 연구 시설입니다. 이번 수소 생산 실증은 인도 원자력 기술 역량이 전력 생산을 넘어 에너지 다각화 단계로 진입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양국 간 원자력 기술 협력 가능성을 탐색하기에 적절한 시점이 열리고 있습니다.

알칼리 전해조나 PEM(양성자교환막) 전해조 방식과 비교할 때, Cu-Cl 열화학 공정의 강점은 에너지 효율에 있습니다. 전기를 매개로 하지 않고 열에너지를 직접 화학 반응에 투입하기 때문에, 동일한 에너지 투입 대비 더 많은 수소를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물론 현재는 기술 실증 단계이며, 상업 규모에서의 경제성과 안정성은 앞으로의 운전 데이터가 쌓이면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원자로가 전기를 만든다는 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원자로가 수소까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은, 2026년 6월 26일 이후의 새로운 상식이 될 것입니다. IGCAR의 실증이 보여준 것은 기술의 가능성이 아니라 기술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이 어떤 속도로, 어떤 규모로 확장될지는 지금부터의 운전 데이터와 각국의 정책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