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7. 2. 12:57ㆍ원자력 뉴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이미 안전성을 인정받은 원전 설계라면,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규제기관은 그 심사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같은 도면, 같은 계산서를 두 번, 세 번 들여다보는 것이 시간과 인력 낭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정리한 규제기관 간 협력 원칙을 들여다보면, 이 질문에는 생각보다 훨씬 신중한 답이 붙어 있습니다. 다른 규제기관의 결과를 활용(Leveraging)하는 것은 분명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 '베끼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활용'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요
IAEA-TECDOC-2098(Collaborative Reviews and Effective Leveraging)은 활용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동일한 원전 설계에 대해 다른 나라의 규제기관이 이미 수행한 심사 결과를, 자국의 규제기관이 자신의 심사 과정에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이때 이미 심사를 마친 쪽을 'Regulator A', 그 결과를 활용하려는 쪽을 'Regulator B'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활용이 검토 절차를 생략하는 지름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Regulator B가 Regulator A의 자료를 가져다 쓰려면, 그 정보가 지금 다루는 사안에 실제로 들어맞는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절차를 항상 거쳐야 합니다. 이를 실사(due diligence)라고 부르는데, 남이 이미 검사를 마친 물건이라도 내가 쓰기 전에는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 한다는 원칙과 비슷합니다. 나라마다 법령 체계도, 인허가 절차의 단계도, 규제기관이 갖춘 역량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한쪽의 결론이 다른 쪽에서 곧바로 유효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활용해도 책임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원칙
활용 제도의 핵심을 관통하는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정보에 입각한 고객 역량(Informed customer capability)'입니다. IAEA는 이를 "공급되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명확한 지식과 이해를 갖춘 조직의 역량"이라고 정의합니다. 원래는 원전 사업자나 인허가 신청자에게 요구되던 개념인데, TECDOC-2098은 이 기준을 규제기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Regulator B가 Regulator A의 심사 결과를 활용한다고 해서, Regulator B의 법적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활용은 어디까지나 업무량을 덜어 주는 수단이지, 책임을 나눠 지거나 떠넘기는 장치가 아닙니다. 그래서 Regulator B는 신청자가 제출한 평가나 외부 컨설턴트의 의견에만 기대어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스스로 독립적인 평가를 수행하거나, 최소한 다른 기관이 내놓은 평가의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정규 인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이 역량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애초에 활용이라는 절차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품질평가는 무엇을 들여다보나요
그렇다면 Regulator B는 실제로 어떤 기준으로 Regulator A의 자료를 검토할까요. TECDOC-2098은 이 과정을 품질평가(Quality Assessment)라는 이름으로 규정하며, 크게 세 개의 축으로 나눕니다.
첫 번째 축은 명확성·정확성·신뢰성입니다. 자료 안에 오류나 모순,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 출처가 정식으로 검토·승인을 거친 것인지, 인용이 적절한지, 독립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있는지를 살핍니다. 근거 자료가 동료 검토(peer review)를 얼마나 거쳤는지도 이 단계에서 함께 평가됩니다.
두 번째 축은 완전성·충분성·관련성입니다. 판단에 필요한 정보가 빠짐없이 제공되었는지, Regulator A의 자료가 Regulator B의 기대 수준을 충족하거나 넘어서는지를 점검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Regulator A가 애초에 어떤 목적과 결과를 위해 심사했는지를 Regulator B의 활용 목적과 나란히 비교합니다. 두 심사의 출발점과 목적지가 다르다면, 자료가 풍부해도 곧바로 가져다 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비교를 통해 빠진 부분, 즉 격차도 함께 식별합니다.
세 번째 축은 최신성입니다. Regulator A가 심사를 마친 이후 설계에 의미 있는 변경이 있었는지, 부지의 특성상 추가적인 근거가 더 필요한 것은 아닌지, 애초에 근거로 삼았던 증거 자체가 이후에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는 않았는지를 확인합니다. 원전 설계는 건설과 시운전 과정에서도 계속 다듬어지기 때문에, 몇 년 전 심사 결과라면 그 사이의 변화를 반드시 짚어야 합니다.

품질평가 이후에는 어떻게 되나요
세 축에 걸친 품질평가를 마치면, Regulator B는 그 결과에 따라 네 가지 중 하나의 후속 조치를 선택하게 됩니다. Regulator A에 추가 정보를 요청하거나, 다른 정보 자원을 새로 탐색하거나, 자체 심사 절차를 조정하거나, 혹은 검토를 통과한 정보를 그대로 자국의 규제 활동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갈래의 선택지 자체가 활용 제도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활용은 '가져다 쓴다, 안 쓴다'의 이분법이 아니라, 품질평가라는 여과 장치를 통과한 정보만 단계적으로 신뢰를 얻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자료가 부족하면 더 물어보고, 그래도 부족하면 다른 곳에서 찾고, 아예 자신의 절차를 그 자료 수준에 맞게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자국 규제 활동에 사용하는 것은 이 모든 검증을 통과한 이후의 일입니다.
결국 다른 나라 규제기관의 심사 결과를 활용한다는 것은, 검증 절차를 건너뛰는 지름길이 아니라 검증의 순서와 분업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같은 설계를 여러 나라가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대신, 이미 쌓인 자료의 품질을 체계적으로 걸러내고 그 위에 자국의 독립적인 판단을 얹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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