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강국 스페인에서 대정전이 난 뒤, 유럽의회가 원전 폐쇄를 멈추라고 했다

2026. 5. 9. 00:38원자력 뉴스

2025년 4월 28일 오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의 전기가 꺼졌습니다. 유럽에서 20년 만에 가장 심각한 대규모 정전, ENTSO-E(유럽 전력망 운영자 연합)가 "최초 유형의 사건"이라고 표현한 사고였습니다. 지하철이 멈추고, 병원이 비상 전력으로 전환했으며, 수백만 명이 냉장고도, 에어컨도 없는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약 1년 뒤인 2026년 5월 6일, 유럽의회 청원위원회(PETI)는 스페인 정부에 이런 권고를 발표했습니다. "Almaraz 원전 폐쇄 절차를 당장 중단하고, 운전기간을 최소 2040년까지 연장하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재생에너지 강국에서 왜 대정전이 일어났나

스페인은 유럽에서 재생에너지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태양광과 풍력이 전력 공급의 상당 부분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왜 대정전이 났을까요?

ENTSO-E의 최종 보고서는 단 하나의 원인을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진동 문제, 전압·무효전력 제어 공백, 발전기 급감과 탈락, 안정화 능력의 불균형 등 복합 요인이 겹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중 '무효전력(reactive power)'은 낯선 개념일 수 있습니다. 전력에는 실제 일을 하는 유효전력과, 전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무효전력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설비는 유효전력을 잘 생산하지만, 전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무효전력 지원 능력은 전통 발전원에 비해 취약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회전 발전기가 없으면, 계통에 충격이 왔을 때 흡수하는 관성(inertia)도 줄어듭니다.

대형 발전기가 돌아가는 것은 팽이가 돌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계통에 흔들림이 와도 관성 때문에 바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재생에너지 중심 계통에서는 이 '팽이'의 수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Almaraz 원전이 스페인에서 갖는 무게

Almaraz 원전은 스페인 중서부 Extremadura에 있는 1,011 MWe와 1,006 MWe 두 기짜리 가압경수로(PWR)입니다. 스페인 전체 전력소비의 약 7% 이상, 약 400만 가구분의 전력을 공급하는 핵심 저탄소 전원입니다.

스페인 정부는 2019년, 7기 원전을 2027~2035년 사이 순차적으로 폐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Almaraz 1·2호기가 그 첫 번째 대상으로, 현재 계획대로라면 2027~2028년에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Almaraz가 문을 닫으면, 스페인은 즉각적으로 2 GWe 이상의 저탄소 기저전원을 잃습니다. 태양광은 밤이 없고, 풍력은 바람이 없으면 멈춥니다. 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가장 빠른 선택은 천연가스 복합화력발전소입니다. 탄소 배출이 늘고, 러시아·중동 가스 의존도가 높아집니다.

더 넓게 보면, Almaraz는 지역 경제의 핵심입니다. 직접·간접 고용 약 4,000명, 지방세수, 협력업체, 지역상권이 모두 이 원전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주변 지역인 Navalmoral de la Mata는 AI 데이터센터나 배터리 공장 같은 신규 산업 투자를 유치하려 할 때, "안정적 전력 공급 가능"을 필수 조건으로 내걸고 있습니다. 원전이 사라지면 이 조건도 함께 사라집니다.

유럽의회는 왜 멈추라고 했나

PETI는 2026년 2월 현지 조사단을 파견해 Extremadura와 Castilla-La Mancha 지역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지역 정부, 주민, 원전 관계자, 시민사회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2026년 5월 6일 채택된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전략적 에너지 인프라 폐쇄는 정치적 일정표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투명한 영향평가에 근거해야 한다."

권고 내용은 구체적입니다.

  • Almaraz 폐쇄 준비 절차 즉시 중단
  • 에너지 안보, 전기요금, 산업경쟁력, 고용, 지역경제를 포함한 포괄적 영향평가 공개
  • 운전기간을 최소 2040년까지 연장 승인
  • 국제 장기운전 사례를 참고해 60년 초과 장기운전 가능성 평가

이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스페인 정부가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EU 수준의 정치적 신호가 보내진 것은 분명합니다.

유럽 원전정책은 어디로 가고 있나

스페인이 탈핵을 향해 걷는 동안,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벨기에는 2025년에 폐쇄하기로 했던 원전 두 기(Doel 4, Tihange 3)의 수명을 10년 연장했습니다. 프랑스는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동유럽 여러 나라들은 SMR(소형모듈원자로) 도입을 추진 중입니다. EU 내에서 원전을 탈탄소 전원으로 공식 인정하는 분류체계(EU Taxonomy)도 적용됩니다.

원전에 대한 유럽의 시선이 바뀌고 있습니다.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입니다. 공급 안보전력계통 안정성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자립이 유럽의 가장 큰 안보 과제가 됐습니다. 재생에너지는 연료비가 없다는 점에서 에너지 자립에 유리하지만, 간헐성 문제가 있습니다. 원전은 연료를 수입하지만, 한 번 장전하면 12~18개월 동안 안정적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2025년 대정전이 전력계통에서 원전이 하는 물리적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탈핵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Almaraz 사례는 "탈핵은 옳고 원전 유지는 틀리다"는 이분법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의 속도와 순서, 전력계통 안정성, 지역 경제, 공급 안보를 함께 고려한 복잡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페인이 처음 탈핵 일정을 잡은 2019년에는, 2025년 이베리아 대정전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