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기관이 혁신의 파트너로: NRC의 "Enabling Mindset" 전환이 의미하는 것

2026. 5. 14. 03:04원자력 뉴스

원자력 발전소를 짓겠다고 나서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벽이 규제입니다. 특히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는 수십 년간 원자력 업계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산"으로 불려왔습니다. 인허가(설계·건설·운영 허가를 받는 절차)에만 수십 년이 걸리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혁신적 설계가 서류 더미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NRC에서 전례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NRC가 스스로 "장벽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26년 5월, NRC 신임 위원장 Ho Nieh는 의회와 업계를 순회하며 이례적인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Enabling is really a mindset." (촉진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고방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Innovators are coming to the market with new designs, so we are not going to be an impediment to innovation. We're trying to adapt our frameworks as the energy landscape adapts."
(혁신가들이 새로운 설계를 들고 시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혁신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에너지 지형이 변화하는 만큼 우리의 체계도 적응하려 합니다.)

 

규제 기관의 수장이 "우리는 장애물이 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NRC는 이 변화를 내부적으로 "Sea Change(근본적 변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단순한 절차 개선을 넘어, 조직 문화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변화를 만든 두 가지 외부 압력

물론 규제 기관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 전환에는 두 가지 명확한 외부 동력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ADVANCE Act(2024년 제정)입니다. 정식 명칭은 '원자로·연료 심사 및 인허가 가속화 프로세스 개발법'으로, 미국 의회가 NRC에 직접 인허가 절차를 빠르게 개선하라고 법으로 지시한 것입니다.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법적 의무였습니다.

두 번째는 2025년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명령(EO)으로, NRC의 구조와 문화적 변화를 명시적으로 지시했습니다. 에너지 안보와 경제 경쟁력 측면에서 원자력을 빠르게 확대하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조치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변화에 대해 민주당 일각에서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Rep. Mike Levin은 "NRC가 obstructionist(방해꾼)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사려 깊고 신중한 방식의 enabling은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원자력 규제 개혁이 여야를 가리지 않는 화두가 된 것입니다.


숫자로 확인되는 변화: 인허가 기간 50% 이상 단축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제로 무언가 달라지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숫자를 봐야 합니다.

NEI(미국원자력에너지협회) 회장 Maria Korsnick이 2026년 5월 12일 워싱턴에서 열린 원자력 에너지 정책 포럼에서 발표한 수치들은 놀랍습니다.

  • 인허가 심사기간 50% 이상 단축
  • 반응기 감독 프로세스 기준 점검 40% 감축 (환경보호는 유지한 채)
  • TerraPower Natrium 원자로 심사: 18개월 완료 — 당초 예정보다 9개월 단축. 이것은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비경수로(기존 원전과 다른 냉각 방식을 사용하는 원자로) 건설허가입니다.
  • Duke Robinson Unit 2: 역대 최단 계속운전허가 완료
  • Kairos Power Hermes 2, X-energy Xe-100: 자체 목표 타임라인 초과 달성

TerraPower의 Natrium 원자로는 특히 상징적입니다. 나트륨 냉각 고속로(액체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방식)라는, 미국에서는 사실상 처음 다루는 설계 유형임에도 18개월 안에 심사를 완료했습니다. 기존 NRC였다면 이런 새로운 유형의 원자로 심사에 훨씬 더 긴 시간이 소요됐을 것입니다.


규제 문화 전환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NRC의 이 변화를 이해하려면, 왜 지금껏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규제 기관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핵 안전을 다루는 기관에서 "빨리빨리"는 위험한 태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NRC의 인허가 절차는 1970~80년대 경수로(물을 냉각재와 감속재로 쓰는 기존 원자로 방식)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소형모듈원자로(SMR)나 고속로에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옷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틀에서 새로운 설계를 심사하려면 규제 당국이 기존 체계를 유연하게 해석하거나 새 규정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NRC가 현재 집중하고 있는 Part 53이라는 새 규칙 체계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경수로에만 맞춰진 기존 규정 대신, 다양한 설계 유형을 포괄할 수 있는 기술 중립적 인허가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Ho Nieh 위원장의 "Enabling is really a mindset"이라는 말은, 규정을 바꾸는 것 이전에 규제관의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안전을 지키는 것과 혁신을 가로막는 것은 다릅니다. NRC는 지금 그 구분을 다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전환이 가져올 변화들

NRC의 변화는 원자력 산업 전반에 연쇄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인허가 기간 단축은 단순히 "시간이 빨라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자력 사업의 가장 큰 재무 리스크는 불확실성, 즉 언제 허가가 날지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인허가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면 투자자들이 계산할 수 있는 사업이 됩니다. Morgan Stanley는 2050년까지 핵에너지 누적 투자액이 2조 2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며, 이를 전년 대비 47% 상향 조정했습니다. 이 예측의 전제 중 하나가 바로 규제 불확실성의 감소입니다.

미국 현장에서 이 변화를 직접 체감하고 있는 것은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사들입니다. TerraPower, Kairos Power, X-energy, Oklo — 이들은 모두 기존 원전과는 다른 설계를 가지고 NRC 문을 두드리고 있는 기업들입니다. 수십 년간 이 문은 사실상 닫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한국에도 직접적인 함의를 가집니다. 미국 원자력 시장은 세계 최대 시장이며, NRC의 인허가를 받은 기술은 전 세계에서 신뢰를 얻습니다. 한국수력원자력(KHNP)이 Southern Nuclear와 기술협력 MOU를 체결하고, TerraPower에 지분 투자를 단행하는 등 미국 시장에 적극적으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도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규제 기관이 바뀌는 것을 두고 "안전이 뒷전이 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타당한 질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구분이 중요합니다. 속도를 높이는 것과 안전 기준을 낮추는 것은 다릅니다. NRC가 줄이고 있는 것은 심사 시간이지 심사 깊이가 아닙니다. 반세기 만의 비경수로 건설허가가 18개월 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심사가 허술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절차가 효율화됐다는 증거로 봐야 합니다.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말이 수십 년간 반복됐지만, 이번에는 규제 기관 스스로 변화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이전과 다릅니다. 그 선언이 단순한 수사(修辭)인지, 진짜 Sea Change인지는 앞으로 몇 년이 증명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