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억 유로 프로젝트보다 빠른 스타트업 — 핵융합의 속도 경쟁, 무엇이 다른가

2026. 5. 14. 03:10원자력 뉴스

핵융합(Nuclear Fusion)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의 에너지"라는 인상이 먼저 떠오르실 겁니다. 수십 년 전부터 "20년 후에는 가능할 것"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왔으니, 그 회의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국제 사회가 200억 유로를 투입해 세우고 있는 거대 프로젝트 ITER보다, 미국의 한 스타트업이 핵심 기술 이정표를 더 빠르게 달성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기술이 부족한 게 아니라, 조직을 구성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의 차이가 속도를 결정한다면 — 그 구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ITER와 CFS, 두 가지 길

ITER(International Thermonuclear Experimental Reactor, 국제열핵융합실험로)는 한국·미국·유럽·중국·러시아·일본·인도 등 35개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핵융합 실험 장치입니다. 프랑스 카다라슈에 건설 중이며, 총 사업비는 200억 유로를 넘어섰습니다. 목표는 핵융합 반응에서 투입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어내는 것, 즉 Q(에너지 게인, 출력 에너지를 입력 에너지로 나눈 값)>1을 실증하는 것입니다. 2026년 5월 초, ITER는 장치의 핵심 자석인 중앙 솔레노이드 마그넷의 최종 부품 인도를 완료했습니다. 부품 수급 측면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넘은 셈입니다.

반면 CFS(Commonwealth Fusion Systems,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즈)는 미국의 민간 핵융합 스타트업입니다. 이 회사가 만들고 있는 SPARC는 ITER보다 훨씬 소형이지만, 접근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SPARC는 HTS(High-Temperature Superconducting, 고온 초전도) 자석 — 기존 초전도 자석보다 훨씬 강한 자기장을 더 작은 장치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기술 — 을 기반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자기장이 강할수록 플라즈마를 더 좁은 공간에 가두어 핵융합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장치 전체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SPARC의 목표는 Q>10, 즉 ITER 목표치의 10배입니다.

2026년 5월 현재 SPARC는 75% 완성 상태이며, 매사추세츠 주 Devens 본사에서 크라이오스탯(Cryostat, 초전도 자석을 극저온으로 유지하는 진공 용기) 베이스 설치와 함께 조립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2027년 말 운전 개시가 목표입니다.


기술 차이인가, 조직 차이인가

SPARC가 더 빠른 첫 번째 이유는 기술 선택에 있습니다. HTS 자석은 201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성능이 개선된 소재입니다. ITER가 설계를 확정한 시점에는 이 기술이 상용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ITER는 기존 저온 초전도(LTS)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CFS는 뒤늦게 출발했기에 오히려 최신 소재를 처음부터 설계에 반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중에 등장한 쪽이 최신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현상을 '후발 주자 이점(Late Mover Advantag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속도 차이를 설명하기는 부족합니다. 조직 구조가 훨씬 더 결정적입니다.

ITER는 35개국 정부가 합의로 운영하는 국제기구 체계입니다. 예산 배분, 설계 변경, 부품 조달 모두 각국의 정치적 합의를 거쳐야 합니다. 한 나라가 공급하는 부품이 지연되면 전체 일정이 밀립니다. 의사결정 구조가 수평적이고 다자적일수록, 속도보다 합의가 우선시됩니다.

CFS는 벤처 투자를 받아 운영되는 민간 기업입니다. 설계 변경은 경영진 판단으로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실패하면 투자자가 손실을 부담하는 구조이므로, 의사결정자는 신속성에 인센티브가 있습니다. 관료적 승인 절차가 없고, 기술 리스크를 감수하는 문화가 조직 전반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같은 기술 목표를 추구하더라도, 누가 결정하고 누가 책임지는가에 따라 실행 속도는 극적으로 달라집니다. ITER는 '공동의 실패를 막기 위한 구조', CFS는 '빠른 성공을 추구하는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력망 연계 신청 — '언젠가의 에너지'를 넘어서

핵융합이 실험실 단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신호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나왔습니다. CFS는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인근에 건설 예정인 ARC 상업 핵융합 플랜트(400MWe 규모)를 PJM 전력망에 연계하는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PJM은 미국 동부 13개 주 이상을 커버하는 미국 최대 전력망 운영 기관입니다. 민간 핵융합 기업이 주요 상업 전력망에 계통연계를 신청한 것은 역사상 처음입니다.

통상 전력망 연계 신청에서 실제 연결까지는 수년이 걸립니다. CFS CEO Bob Mumgaard는 "2030년대 초 전력망 연계"를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이 로드맵은 SPARC(2027년 운전 개시) → ARC 설계·건설 → 2030년대 초 상업 발전의 순서로 이어집니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이미 구매자가 확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Google과 이탈리아 에너지 기업 Eni는 ARC에서 생산될 전력의 선구매(PPA, Power Purchase Agreement, 장기 전력구매계약)를 확정했습니다. 기술이 완성되기 전에 수요자가 먼저 나선 것은, 핵융합 전력이 단순한 희망이 아닌 사업적 판단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ITER는 실패한 프로젝트인가

이쯤에서 당연히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CFS가 앞서간다면 ITER는 낭비인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ITER와 SPARC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ITER는 핵융합 물리를 실험적으로 검증하고, 35개국이 공유할 수 있는 데이터와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특정 기업이나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지식 기반을 쌓는 프로젝트입니다. 반면 SPARC는 특정 기술 경로(HTS 자석 기반 소형 토카막)로 상업화를 앞당기는 데 집중합니다.

두 접근이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완적입니다. ITER에서 나오는 플라즈마 물리 데이터는 SPARC와 같은 후속 장치의 설계에 반영될 수 있고, SPARC의 빠른 실증은 핵융합 전체 생태계의 투자와 인재 유입을 가속화합니다.

속도가 빠른 것이 더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직 구조가 속도를 결정한다는 사실은 핵융합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혁신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 것인가 — 그 선택이 결과의 절반을 미리 결정합니다.

핵융합이 2030년대에 실제 전기를 생산하는 날이 온다면, 그 이정표는 기술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 의사결정 구조의 승리이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