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추진 상선의 시대가 온다 — 한국 조선업은 어디에 서 있는가

2026. 5. 19. 10:27원자력 뉴스

상선에 원자로를 얹는다는 이야기, 처음 들으면 공상과학 소설처럼 느껴지실 겁니다. 하지만 2026년 5월, 미국 정부가 이것을 공식 정책으로 선언했습니다. 미국 해양청(MARAD)이 상업용 선박에 SMR(소형 모듈 원자로, Small Modular Reactor)을 탑재하기 위한 산업계 의견 수렴에 착수한 것입니다. 이 뉴스가 한국에 중요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세계 조선 시장 1위가 바로 한국이기 때문입니다.


왜 미국은 지금 상선 핵추진에 나섰는가

미국 교통부 장관 Sean Duffy는 이번 RFI(정보요청서, Request for Information) 발표에서 배경을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해양 원자력 추진을 조선소·항만·보험·물류 네트워크에 통합하며 미국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 미국 스스로 전략적 열세를 인정한 발언입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이미 Akademik Lomonosov(아카데믹 로모노소프)라는 부유식 원전을 운영 중이며, Baltiysky Zavod 조선소를 통해 핵추진 쇄빙선을 양산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중국도 ACPR50S라는 자체 설계의 부유식 원전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해양 원자력이라는 판을 두 강대국이 먼저 깔고 있는 셈입니다.

MARAD의 RFI는 단순한 연구 용역이 아닙니다. NRC(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DOE(에너지부)·해안경비대가 함께 참여하는 범정부 프로젝트로, 기술 실증 단계를 넘어 상용화 가능한 설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핵심 목표로 제시된 여섯 가지—효율성, 비용절감, 국가안보, 확장성, 인력 파이프라인, 규제 프레임워크—는 미국이 이 시장을 얼마나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핵추진 상선, 왜 지금 기술적으로 가능한가

"원자로를 배에 싣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드시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핵추진 선박 자체는 이미 수십 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핵추진으로 운용해 왔고, 러시아의 핵추진 쇄빙선은 상업적으로 운영 중입니다.

달라진 것은 SMR의 등장입니다. 기존 대형 원자로는 출력이 1,000MWe(메가와트 전기) 이상으로 선박에 탑재하기에 너무 크고 무거웠습니다. SMR은 출력을 수십~수백 MWe 범위로 낮추면서 설계를 단순화한 소형 원자로입니다. 공장에서 모듈 단위로 제작해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어서 건조 기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대형 컨테이너선의 주기관 출력이 보통 40~90MW 수준임을 감안하면, SMR의 출력 범위는 상선 추진에 기술적으로 적합합니다.

운항 측면에서의 장점도 명확합니다. 핵연료는 한 번 장전하면 수년간 교체가 필요 없어, 현재 선박의 최대 운영 비용 중 하나인 벙커유 연료비가 사라집니다. 항속거리와 속도 제한도 사실상 없어집니다. 대형 컨테이너선이 연료 재보급 없이 태평양을 몇 번이고 횡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1위 조선국 한국의 기회와 과제

한국 조선업은 이 변화의 한복판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HD현대중공업·HD한국조선해양은 SMR 추진 컨테이너선 콘셉트를 개발 중이며, TerraPower(빌 게이츠가 설립한 차세대 원자로 기업)와 파트너십 협정도 맺어 둔 상태입니다. 이는 단순한 관심 표명이 아니라 기술 준비를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조선 3사(HD현대·삼성중공업·한화오션)가 이 시장에서 취할 수 있는 전략적 포지션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박 통합사로서의 역할입니다. 원자로 자체를 개발·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SMR을 선박 설계에 통합하고 건조하는 역할입니다. 한국 조선사들은 LNG(액화천연가스) 추진선, 암모니아 추진선 등 새로운 연료 시스템을 선박에 통합해온 경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핵심 역량은 원자로가 아니라 선박 설계와 건조 기술에 있으며, 이 관점에서 한국은 글로벌 SMR 개발사들의 최선호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원자력 공급망 연계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이미 여러 SMR 개발사와 부품 공급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조선사와 원자력 기자재 업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패키지로 대응한다면, 미국 시장이나 유럽 시장에서 단순 조선사 이상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MARAD RFI의 의견 제출 마감은 2026년 8월 5일입니다. 이 기간은 단순히 미국의 정보 수집 절차가 아닙니다. 어떤 기업이, 어떤 역량으로,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지를 미국 정부와 규제 당국이 평가하는 시간입니다. 한국 기업들이 이 창구에 의견서를 제출하는 것 자체가 시장 선점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규제라는 현실의 벽, 그리고 기회

물론 낙관만 할 상황은 아닙니다. 핵추진 상선이 항구에 접안하려면 해당 국가와 항만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현재 국제해사기구(IMO)의 규정 체계는 핵추진 상선을 본격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MARAD도 이 점을 인식해 보험·검사·법적 책임 프레임워크 수립을 RFI의 핵심 목표 중 하나로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규제의 공백이 반드시 장벽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규제 프레임워크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 참여한 기업과 국가가 그 규제의 방향을 함께 만들어가게 됩니다. 미국이 NRC·USCG 협력 모델을 통해 국내 규제를 먼저 정립하면, 이는 국제해사기구의 핵추진 상선 코드 개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이 논의에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완성된 규제 체계에 수동적으로 적응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조선업의 다음 판을 읽는 방법

핵추진 상선이 2030년대에 실제로 상업 운항을 시작할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규제 장벽, 항만 수용성, 보험 시장의 대응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범정부 차원에서 이 시장에 공식 착수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타당성 조사를 넘어섭니다.

LNG 추진선이 처음 논의될 때를 기억하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선박에 가스 탱크를?"이라는 시선이 많았지만, 지금 LNG 추진선은 한국 조선업의 핵심 수주 품목입니다. 다음 전환점이 어디서 오는지 먼저 읽는 쪽이 시장을 만들게 됩니다.

세계 조선 시장 1위라는 지위는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 지위를 핵추진 상선 시대까지 이어가려면, 지금 이 시점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