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사 간 기술 — 한국 원자력의 역설

2026. 5. 19. 10:36원자력 뉴스

빌 게이츠가 설립한 회사가 한국 연구원에 70억 원을 내고 기술을 사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을 개발한 나라, 한국에서는 관련 예산이 깎이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구매자가 증명해줬는데, 정작 개발국이 투자를 줄이고 있는 상황. 이 역설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STELLA-2가 뭐기에 TerraPower가 돈을 냈나

2026년 5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이 미국 TerraPower에 소듐냉각고속로(SFR: Sodium-cooled Fast Reactor) 핵심 안전시험 기술을 이전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SFR은 기존 원자로와 달리 물 대신 액체 나트륨(소듐)을 냉각재로 쓰는 4세대 원자로입니다. 핵분열 연쇄반응에서 나오는 고속 중성자를 그대로 활용하기 때문에 우라늄 이용 효율이 훨씬 높고, 사용후핵연료를 다시 연료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차세대 에너지 기술로 꼽힙니다.

이번에 이전된 기술의 핵심은 STELLA-2입니다. 나트리움 냉각재의 열수력·안전 특성을 종합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시험설비로, KAERI가 독자 개발한 세계 최고 수준의 SFR 안전시험 인프라입니다. 계약 규모는 약 70억 원(약 467만 달러)이며, TerraPower 엔지니어 10여 명이 5월 11일부터 15일까지 KAERI 현장에서 직접 교육을 받으며 기술이전을 완료했습니다. 나트리움 물리·화학적 특성부터 계측·안전관리, 취급 실습, STELLA-2 종합시험 실습까지 전 주기 커리큘럼이었습니다.

TerraPower는 지금 미국 와이오밍주 케머러(Kemmerer)에서 345MWe 규모의 나트리움 원자로 'Natrium'을 실제로 건설하고 있습니다. 2026년 3월에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미국 역사상 최초의 비(非)경수로 상업원자로 건설허가를 받았습니다. STELLA-2 기술을 구매한 이유가 분명합니다. 미국 내에 독자적인 SFR 안전시험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실증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술의 값은 세계가 매겼다

이 거래가 갖는 의미를 명확히 짚어야 합니다. TerraPower가 돈을 낸 것은 KAERI의 기술력에 대한 시장 검증입니다. 빌 게이츠가 설립하고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회사가 세계 시장에서 대안을 찾다가 한국 연구원의 기술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주장을 한국 정부가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까다로운 구매자가 직접 증명한 셈입니다.

한국과 TerraPower의 연결고리는 이번 기술이전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닙니다. SK이노베이션과 한국수력원자력(KHNP)이 TerraPower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두산에너빌리티는 별도 부품공급계약을 체결했고, HD현대중공업은 2025년 3월 파트너십 협정을 맺었습니다. 한국 산업계가 광범위하게 Natrium 프로젝트에 연결돼 있는 구조입니다. Natrium 프로젝트가 진척될수록 이들 기업의 수주 기회가 확대된다는 점은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반쪽짜리 그림입니다.


예산이 줄어드는 사이 IP가 빠져나간다

KAERI는 STELLA-2 외에도 SALUS라는 4세대 SFR을 자체 개발하고 있습니다. SALUS(사용후핵연료 소각 및 발전 겸용 SFR)는 2021년부터 본격 개발에 들어간 한국형 4세대 원자로입니다. 그런데 관련 예산이 지속적으로 삭감되면서 사업 지연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실을 나란히 놓으면 역설이 선명해집니다. KAERI가 보유한 SFR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 시장에서 확인됐습니다. 그 기술의 핵심 지식재산권(IP)과 설계·제조 노하우가 미국으로 이전됐습니다. 그리고 정작 그 기술을 기반으로 자국 원자로를 만들어야 할 국내 예산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술이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70억 원 규모의 수출은 분명한 성과이고, 한·미 원자력 협력의 심화라는 맥락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후의 그림입니다. 핵심 IP를 이전한 뒤, 한국이 독자적인 4세대 원자로를 상용화하는 주체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미국이나 제3국이 SFR 시장을 열었을 때 부품 공급사로 참여하는 역할로 정착될 것인지 — 그 선택이 지금 예산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산업계에서는 이미 경고음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내 SFR 상용화 투자 공백이 장기화될수록 기술 주도권을 되찾기 어려워진다는 우려입니다. SALUS 사업 지연이 단순한 예산 문제가 아니라 전략적 포지셔닝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기술은 있다, 그다음 선택이 남아 있다

TerraPower가 STELLA-2를 구매한 사실은 한국에 불리한 뉴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이 4세대 원자력 기술에서 협상 레버리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향후 글로벌 SFR 시장에서 공동개발·수출 프레임워크를 협상할 때, 한국이 단순 구매자가 아니라 기술 보유국으로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근거가 생긴 셈입니다.

관건은 그 근거를 유지하느냐입니다. STELLA-2의 설계·제조 노하우가 이전됐더라도, KAERI가 SALUS 개발을 지속하면 한국은 완성형 SFR을 가진 나라가 됩니다. 예산이 끊기고 인력이 흩어지면, 기술은 있되 그것을 구현할 조직이 사라지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진 연구원이 그 기술을 외국에 팔고 있는 동안, 그 기술로 자국 원자로를 만드는 사업은 예산 부족으로 늦어지고 있다. 이 역설은 기술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전략적 우선순위 결정의 문제입니다.

TerraPower가 미국에 SFR 안전시험시설을 구축하고, Natrium 원자로 상업 운전에 성공하는 날, 그 안에는 한국 기술의 흔적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때 한국이 어느 자리에 있을지는 지금 SALUS 예산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