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재단이 원전을 지지한다 — GCNP 출범과 원자력 서사의 재편

2026. 5. 20. 23:05원자력 뉴스

"원자력"과 "록펠러재단"이라는 두 단어가 같은 문장에 등장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환경 자선사업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이 원전 지지 연합을 공동 창설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투자 결정이 아니라 수십 년간 유지되어 온 이념적 경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2026년 5월 19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Philanthropy Asia Summit(자선 아시아 서밋)에서 록펠러재단과 싱가포르 테마섹트러스트가 '글로벌 원자력 자선연합(Global Coalition for Nuclear Philanthropy, GCNP)'의 출범을 공동 선언했습니다. 자본이 흐르는 방향이 바뀔 때 현장도 바뀝니다. 이 연합이 개도국 원전 도입과 공론화 지형에 어떤 연쇄 효과를 낳을지 살펴봅니다.


기후 자선자금 1,000달러 중 원자력에 가는 돈은 얼마일까

ClimateWorks Foundation의 데이터에 따르면, 현재 기후 관련 자선자금 가운데 원자력을 지원하는 비중은 0.1~0.2%에 불과합니다. 1,000달러를 기부하면 원자력에 돌아가는 몫은 2달러 미만이라는 뜻입니다.

태양광·풍력·에너지 효율화에 집중된 기후 자선자금의 구조는 단순히 '선호의 차이'가 아닙니다. 어느 기술이 연구되고, 어느 지역에 파일럿 프로젝트가 들어서고, 어느 국가에서 원전 공론화가 가능해지느냐를 결정하는 구조적 편향입니다. 지식, 인력, 정책 네트워크는 자금이 모이는 곳에서 자랍니다. 원자력이 기후 자선자금의 변방에 머물렀던 수십 년 동안, 관련 생태계는 비교적 얇게 유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GCNP는 바로 이 구조를 문제로 직접 지목하며 출범했습니다. "자선 자본이 수십 년간 원자력 분야에 과소 투자해 왔다"는 선언은 단순한 아쉬움 표명이 아닌, 조직적 개입의 근거입니다.


GCNP는 어떻게 구성됐나, 그리고 왜 싱가포르인가

창립 구성을 살펴보면 이 연합의 전략적 의도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공동 창설자는 록펠러재단과 테마섹트러스트입니다. 록펠러재단은 미국 환경 자선사업의 역사적 상징이고, 테마섹트러스트는 싱가포르 테마섹홀딩스 산하 자선 법인입니다. 창립 멤버로는 Blue Horizons Foundation, CleanEcon, Founders Pledge, Ray Rothrock, Rodel Foundation이 이름을 올렸으며, Oppenheimer Project(오펜하이머 프로젝트)가 전략 파트너를 맡습니다.

주목할 점은 Founders Pledge와 CleanEcon의 참여입니다. 두 조직은 '효과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 네트워크와 밀접한 테크·실리콘밸리 자선 생태계에서 활동해온 단체입니다. 이들의 합류는 GCNP가 전통 환경 자선 진영과 기술 커뮤니티 자선 진영을 동시에 아우르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발표 장소가 싱가포르라는 점도 우연이 아닙니다. 테마섹트러스트의 지리적 기반이기도 하지만, 인도네시아·베트남·필리핀 등 원전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ASEAN 국가들과의 근접성을 의식한 선택으로 읽힙니다. GCNP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의 원전 도입을 최우선 지원 대상으로 명시했습니다. 아시아 자선 생태계의 중심에서 출범 선언을 한 것은, 이 연합의 지향이 서방 중심이 아닌 글로벌 남반구(Global South)임을 시사합니다.


4가지 경로 — 기술이 아닌 생태계를 키운다

GCNP는 향후 5~10년간 네 가지 전략 경로를 제시합니다. 눈여겨볼 것은, 어느 하나도 원자로 기술 자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첫째, 공론화(Build the Case). 문화와 국가별로 맞춤화된 원자력 편익 내러티브를 구축하여 지속적인 대중 지지를 확보한다는 경로입니다. 원전에 대한 찬반 논쟁은 기술적 사실만으로 결판나지 않습니다. 동일한 사고 기록도 어떤 서사 틀 안에 담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공론화 경로는 이 서사 구조 자체에 투자하겠다는 뜻입니다.

둘째, 생태계 확장(Grow the Field). 원자력 인력·기관·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경로입니다. 원전을 짓고 싶어도 현지에 관련 인재와 기관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개도국에서 원전 인력을 양성하고, 독립적인 연구·감시 기관을 키우는 것이 이 경로의 핵심입니다.

셋째, 투자 가능성 제고(Make it Bankable). 원전 프로젝트의 리스크를 완화하는 금융 구조를 설계해 공공·민간 자본의 유입을 유도하는 경로입니다. '뱅커블(bankable)'이란 투자 가능한 상태를 뜻하는 금융 용어입니다. 원전은 건설 비용이 크고 기간이 길어 민간 금융기관이 단독으로 떠안기 어렵습니다. 부분 보증, 블렌디드 파이낸스(blended finance, 공공 자금과 민간 자금을 혼합해 리스크를 분산하는 방식)와 같은 구조를 자선 자본이 지원하면, 개도국 원전 프로젝트에 상업 자본이 들어올 여지가 생깁니다.

넷째, 거버넌스 강화(Strengthen Governance). 핵안전과 핵안보(핵물질이 테러·범죄에 이용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체계) 프레임워크를 강화하는 경로입니다. 원전을 처음 도입하는 국가일수록 독립적이고 역량 있는 규제기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규제 역량 없는 원전 도입은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은 결국 원자력 전반에 대한 불신을 키웁니다. 거버넌스 경로는 이 취약한 고리를 미리 강화하려는 시도입니다.

네 경로를 관통하는 공통 논리가 있습니다. 원전 도입의 장벽은 기술 부재가 아니라 생태계 부재라는 인식입니다. 이미 검증된 원자로 설계는 여럿 있고, 그것을 살 의지가 있는 정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론화, 인력, 금융 구조, 거버넌스가 받쳐주지 않으면 사업은 시작되지 않거나 중간에 좌초됩니다. GCNP는 바로 그 비기술적 장벽을 허무는 데 자선 자본을 투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록펠러재단의 참여가 갖는 상징성

이 연합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록펠러재단입니다. 석유 자본에서 출발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환경 자선사업의 중심축으로 기능해 온 재단이 원전 지지 연합에 공동 창설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원자력은 오랫동안 환경 운동 안에서 이견이 갈리는 주제였습니다. 기후 위기 대응 수단으로 원자력을 적극 지지하는 진영과, 핵폐기물·사고 위험을 이유로 반대하는 진영이 공존해 왔습니다. 록펠러재단의 GCNP 참여는 이 균열이 이제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COP28에서 38개국이 원전 용량을 2050년까지 3배로 늘리기로 선언한 흐름과, 록펠러재단의 이번 결정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GCNP는 COP28 원전 3배 선언 달성을 조직의 목표와 명시적으로 연계했습니다.

이 변화는 원자력 기술의 변화 때문이 아닙니다. 기후 위기의 규모와 긴급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어떤 에너지를 거부할 여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선 진영 안에서도 재검토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선 자본이 개도국 원전 도입의 공론화를 바꿀 수 있다면

개발도상국에서 원전 도입 논의는 기술보다 훨씬 앞서 걸리는 장벽들이 있습니다. 대중이 원자력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독립적인 전문가 집단이 있는지, 규제기관이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지, 건설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가 모두 선결 조건입니다.

지금까지 이 비기술적 영역에 체계적으로 투자하는 자선 자본은 거의 없었습니다. 기후 자선자금의 압도적 다수가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효율화로 향하는 구조에서, 원자력 공론화나 규제 역량 강화를 위한 자금은 각국이 단편적으로 확보해야 했습니다.

GCNP가 제시한 '투자 가능성 제고' 경로가 실제 블렌디드 파이낸스 구조로 이어진다면, 개도국 원전 프로젝트를 가로막았던 금융 장벽이 낮아집니다. 테마섹트러스트의 참여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ASEAN 원전 도입 논의에 싱가포르 자본 네트워크가 연결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선언과 실행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GCNP의 첫 번째 구체적 지원 프로그램이 어떤 국가, 어떤 경로에 집중될지가 이 연합의 실질적 영향력을 판단하는 첫 기준이 될 것입니다. 2026년 하반기 터키에서 열리는 COP31에서 GCNP가 어떤 의제와 사례를 제시하는지도 주목할 지점입니다.

자선자금이 재편되면 연구가 재편되고, 연구가 재편되면 공론화가 바뀌고, 공론화가 바뀌면 정책이 달라집니다. 기후 위기 대응의 판도가 기술 경쟁 못지않게 서사와 자본의 흐름에 의해서도 결정된다는 것을, GCNP 출범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