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1. 22:44ㆍ원자력 뉴스
"AI 붐이 원전을 되살린다"는 이야기, 막연하게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것이 이미 구체적인 법안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2026년 5월 20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NC) 주의회 하원 에너지·공공사업위원회에서 심의된 법안 하나가 이 흐름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석탄 발전소를 폐쇄하려면 먼저 원전 건설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왜 이런 법이 나왔는지, 그 배경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석탄 발전소를 끄려면, 원전부터 켜라
노스캐롤라이나 법안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Duke Energy(듀크 에너지, 미국 남동부 최대 전력 유틸리티)가 기존 석탄·천연가스 발전소를 폐쇄하려면, 그 전에 노스캐롤라이나 유틸리티위원회(NCUC)로부터 신규 원전 건설허가(CPCN: Certificate of Public Convenience and Necessity, 공공편의·필요성 인증서)를 먼저 취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Duke Energy가 제출한 석탄 발전소 폐쇄 일정을 보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됩니다. Mayo 발전소는 2031년, Cleveland County는 2031~2033년, Marshall Steam Station은 2032~2034년, Roxboro는 2034년 순서로 문을 닫을 예정입니다. 이 발전소들의 피크 용량(최대 출력 기준 설비 규모)을 합산하면 약 6.2GW에 달합니다.
6.2GW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 감이 잘 오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현재 운영 중인 한국의 대형 원자로 한 기의 출력이 약 1~1.4GW입니다. 이를 대입하면, Duke Energy의 석탄 설비를 원자력으로 대체하려면 최소 5기의 대형 원자로가 필요합니다. 법안을 공동 발의한 매튜 윈슬로우(Matthew Winslow) 공화당 의원은 "기저부하 자원(baseload resource, 날씨나 시간에 관계없이 24시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원)은 반드시 새로운 원자력 기저부하로 대체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법안 뒤에 AI 데이터센터가 있다
이 법안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의회가 원자력을 전략적 우선순위로 설정한 데는 두 가지 압력이 맞물려 있습니다.
첫 번째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폭증입니다. ChatGPT 같은 대형 AI 모델을 학습·운영하는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기를 소비합니다. Duke Energy는 이미 AI 관련 대규모 전력 구매 계약(PPA: Power Purchase Agreement)을 다수 체결하고 있습니다. AI 기업 입장에서는 안정적이고 탄소 배출이 없는 전력이 필수인데, 태양광·풍력은 해가 없거나 바람이 없으면 출력이 뚝 떨어지는 간헐성 문제가 있습니다.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원자로야말로 AI 데이터센터에 이상적인 전력원입니다.
두 번째는 2050년 탄소중립 목표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석탄을 줄이면서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유지해야 합니다. 태양광과 풍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천연가스는 탄소를 배출합니다. 결국 원자력이 석탄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로 부상한 것입니다.
이 두 흐름이 합쳐지면서, 노스캐롤라이나 의회는 원전 확보를 석탄 폐쇄의 전제조건으로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법안의 영리한 설계, 그리고 남은 과제
이 법안에는 흥미로운 기술적 세부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원전 가동 시작이 아니라 CPCN 발급 시점만을 조건으로 명시했다는 점입니다. 왜 이 차이가 중요할까요?
Vogtle-3·4호기 사례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된 이 원전처럼, 신규 대형 원전 건설에는 약 15년이 소요됩니다. 만약 법안이 "원전이 실제로 가동돼야 석탄을 끌 수 있다"고 규정했다면, Duke Energy는 석탄 폐쇄를 최소 15년 이상 미룰 수 있는 근거가 생깁니다. 대신 건설허가 취득 시점만을 조건으로 설정함으로써, 허가를 받은 뒤 건설 중인 상태에서도 석탄 폐쇄를 진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입니다.
그럼에도 환경단체들의 우려는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CPCN 취득 자체도 수년이 걸리는 과정이어서, 법안이 통과되면 현행 석탄 폐쇄 일정이 사실상 연장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전 확대와 탈탄소화 속도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 이것이 이 법안이 남긴 진짜 질문입니다.
미국 남동부에서 시작된 파동, 어디까지 퍼질까
소스 브리핑은 이 법안을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의 탈탄소화와 원전 확장 간의 연계 정책이 미국 남동부(Southeast)에서 입법으로 구체화되는 첫 사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법안이 하원·상원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유사한 입법이 다른 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이 법안이 주목받는 이유는 원자력을 단순한 '에너지원' 차원이 아니라 AI 시대의 인프라로 재정의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원전 전력을 직접 구매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미국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노스캐롤라이나 법안은 이 흐름을 주 정부 차원에서 정책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입니다.
원자력에 대한 시선이 바뀌고 있습니다. 위험하고 낡은 기술이라는 이미지 대신, AI 문명을 전력으로 뒷받침하는 기반 인프라로서의 원자력. 노스캐롤라이나 법안은 그 전환의 한 장면입니다. 이 흐름이 한국 에너지 정책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다음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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