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이후 일본이 선택한 두 가지 재건 — 규제 혁신과 슈퍼 엔지니어

2026. 5. 29. 03:13원자력 뉴스

원자력 발전소가 다시 돌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많은 분들이 먼저 설비를 떠올리실 겁니다. 내진 강화, 냉각 시스템 이중화, 수소 폭발 방지 장치. 그런데 실제로 원전 재가동을 준비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가 설비가 아니라 규제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2011년 후쿠시마 다이이치 사고 이후 일본이 걸어온 길은 그 점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원자력 안전의 '언어'는 나라마다 다릅니다

원자력 규제 분야에는 RIPB(Risk-informed Performance-based, 위험도정보 활용 성능기반) 접근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 잘못될 수 있고,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를 데이터와 확률로 계산해 규제자원을 집중 배분하는 방식입니다. 미국·영국·캐나다·일본 모두 이 방향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각국이 구현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릅니다.

미국 NRC(원자력규제위원회)는 이를 가장 명시적으로 제도화했습니다. ROP(원자로 감시 프로세스)라는 체계 아래, 원전의 이상 징후를 초록·흰·노랑·빨강 네 가지 색상으로 분류하고, 색상에 따라 규제 개입 강도를 단계적으로 높이는 구조입니다. 일정 기준을 넘으면 추가 검사가 자동으로 발동되는, 일종의 신호등 방식입니다.

영국 ONR은 다른 철학을 씁니다. 규제기관이 세부 설계 방법을 직접 처방하지 않고, 사업자가 위험을 ALARP(As Low As Reasonably Practicable, 합리적으로 낮출 수 있는 수준까지 저감)를 달성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구조입니다. 규제 결과보다 사업자의 입증 책임을 중시하는 목표 설정형 모델입니다.

캐나다 CNSC는 그 중간쯤에 위치합니다. 시설별 허가 조건(licence basis)과 위험도에 비례한 규제 강도 조정(graded approach)을 조합해 유연성을 확보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은 네 나라 중 가장 보수적인 체계를 선택했습니다.

안전을 강화했더니 재가동이 멈췄다 — 일본의 규제 역설

후쿠시마 사고 이전 일본은 54기의 원전으로 전력의 약 30%를 공급하던 나라였습니다. 사고 이후 모든 원전이 멈췄고, 새로 설립된 NRA(원자력규제청)는 강화된 규제기준을 기존 원전에도 소급 적용하는 backfit(소급 적용) 방식을 핵심 축으로 삼았습니다. 외부 재해 방호, 중대사고 대처 설비, 수소 폭발 방지 장치, 비상 전원 확보 등 결정론적 강화 요건이 대폭 늘었습니다.

규제를 더 엄격하게 만든 것은 당연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발생합니다. 재가동을 위해 충족해야 할 요건이 많아질수록, 심사 기간은 길어지고 인허가 불확실성은 높아집니다. 현재 일본은 33기의 운전 가능 원전 중 재가동이 완료된 원전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원자력 전력 비중은 여전히 사고 이전 수준에 크게 못 미칩니다.

이 역설의 배경에는 사회적 신뢰 회복이라는 무거운 과제가 있습니다. 미국이 TMI(스리마일 섬) 사고 이후 PRA(확률론적 위험도 평가)와 정량적 성능 감독 체계를 키워온 것과 달리, 일본은 후쿠시마 이후 명시적 기준 충족과 보수적 심사를 우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국 규제 체계의 차이는 기술 역량의 차이가 아닙니다. 사고 경험과 그 이후 사회가 규제기관에 요구한 역할이 달랐던 결과입니다.

설비보다 먼저 필요한 것 — 슈퍼 엔지니어 프로젝트

재가동이 지연되는 동안 또 다른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원전은 남아 있는데,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수년간 정지 상태에서 단절된 운전 경험, 방사선방호 실무 감각을 잃은 기술자들, 규제기관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젊은 세대. 이것이 일본 원자력 산업이 직면한 현실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5년에 시작된 것이 Super Engineer Project입니다. 일본 METI(경제산업성)와 홋카이도대학의 후원 아래, 미국 일리노이대(UIUC)의 원자력공학 프로그램, ISOE(국제방사선업무종사자 피폭정보 시스템) 미국 지부, 미국 원전 현장이 참여한 국제 현장교육 모델입니다.

선발 방식이 눈길을 끕니다. 약 350명의 지원자 중 매년 5명, 즉 상위 1.3% 수준의 학생만 선발했습니다. "슈퍼 엔지니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입니다. 선발된 학생들은 미국 원전 현장을 직접 방문해 방사선방호 관리자, ALARA 담당자와 함께 일했습니다. NRC 지역 사무소를 방문해 검사관과 의견을 나누고, ISOE 심포지엄에서 국제 방사선방호 전문가 네트워크에 참여했습니다.

2015~2017년 3년간 총 15명이 집중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졸업생들은 현재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인근 BWR(비등수형 원자로) 운전원 훈련 센터에서 운전원 교육을 담당하고, BWRX-300 같은 소형모듈원전(SMR)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이후 Nuclear Power Dojo로 이어져 현재 900명 이상의 학생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원전을 세우거나 재가동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문화와 역량을 갖춘 사람을 만드는 일이 더 어렵고 더 오래 걸립니다.

SMR 시대를 앞두고 한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일본이 2015년에 시작한 이 프로그램을 한국은 아직 갖추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국은 원전 계속운전, 신규 원전 건설, SMR 개발, 해외 수출, 해체, 방사선방호, 사이버보안 등 복합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강의실 중심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규제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PRA 역량이 필요하고, 영국 시장에서는 ALARP 논리와 safety case(안전 논증서) 작성 역량이 핵심입니다. 캐나다는 시설별 허가 조건 관리와 graded approach 적용논리, 일본은 보수적 기준적합성 심사 대응이 요구됩니다. 각국의 규제 언어가 다른 만큼,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수출 전략의 출발점입니다.

미국이 현재 추진 중인 Part 53은 대형 경수로 중심으로 설계된 기존 규제체계를 SMR, 비경수로, 마이크로원자로에도 적합하게 조정하려는 시도입니다. 기술포괄적(technology-inclusive)이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특정 설계에 맞춰 규정을 쓰는 게 아니라, 안전 기능과 성능 기준을 중심으로 어떤 원자로 기술이든 수용할 수 있는 틀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규제 지형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 변화에 맞춰 인재를 준비하지 않으면, 기술력이 있어도 시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각국 규제 체계의 차이는 어느 나라가 더 선진적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 법문화, 산업구조, 사고 경험이 만들어낸 서로 다른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 선택을 이해하고, 그 위에서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 다음 시대 원자력 경쟁력의 핵심입니다. 일본은 규제 재건과 인재 재건을 동시에 추진하며 그 교훈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