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9. 11:05ㆍ원자력 뉴스
핵융합이 '항상 30년 후의 기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수십 년째 반복되는 이 농담 속에는 진짜 좌절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흐름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국제 핵융합 프로젝트인 ITER가 자신의 초전도 자석 시험 설비를 민간 핵융합 기업들에게 개방하기로 했습니다. 작은 결정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왜 핵융합 상업화의 판을 바꾸는 움직임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4K(-269°C), 이 숫자가 왜 중요한가요?
2026년 5월 21일, 프랑스 카다라슈(Cadarache) ITER 부지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세워졌습니다. ITER Magnet Cold Test Facility(자석 냉각 시험 설비)가 330톤짜리 토로이달 자기장 코일(TF Coil)을 4켈빈, 즉 영하 269도까지 냉각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영하 269도라는 온도는 우주 공간보다도 차갑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냉각해야 할까요?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려면 플라즈마(수억 도의 이온화된 가스)를 강력한 자기장으로 가두어야 합니다. 이 자기장을 만드는 것이 초전도 자석입니다. 초전도체(superconductor)는 특정 온도 이하로 냉각될 때 전기 저항이 완전히 사라지는 소재로, 막대한 전류를 손실 없이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ITER의 TF 코일은 니오브-주석(Nb₃Sn) 초전도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최대 68,000암페어(68kA)의 전류를 흘립니다. 가정용 콘센트의 전류가 10~15암페어임을 생각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극단적인지 느껴지실 겁니다.
냉각 성공까지 12일이 걸렸습니다. 800세제곱미터 크기의 극저온 용기 안에서 300톤이 넘는 코일이 서서히 온도를 낮추는 과정입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단순히 냉각이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코일이 초전도 상태로 전환된 이후 고전압 지락 절연이 유지되는지, 퀜치(quench) — 초전도 상태가 갑자기 무너져 순간적으로 엄청난 열이 발생하는 현상 — 가 발생할 때 감지 시스템이 작동하는지, 그리고 명목 전류 조건에서 코일 성능이 설계대로 나오는지를 실제 하드웨어로 검증하는 것입니다.
ITER는 "외부 시험이 기계 내 실제 운전 조건을 100% 재현할 수는 없으나, 자석 거동·냉각 성능·전기 인터페이스·계측·코일 내 임계 조인트 특성에 관한 필수 정보를 제공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한 문장에 이 시험 설비의 존재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거대한 핵융합 장치 안에 설치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미리 알아두는 것. 그것이 조립 단계에서의 치명적 오류를 막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이 설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재활용의 지혜
이 시험 설비를 이해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유럽 국내 기관(European Domestic Agency)이 ITER의 대형 폴로이달 자기장 코일(PF Coil)을 제조하기 위해 사용했던 건물을 그대로 전용했습니다. 건물 규모, 천장 크레인, 인근의 극저온 냉동 플랜트 — 이미 있던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한 것입니다. ITER 사무총장 Pietro Barabaschi는 이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ITER는 초유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서 창의성과 규율이 모두 필요합니다. 기존 인프라 재활용과 냉동 플랜트 역량 활용, 다학제 팀 동원으로 조립 전 리스크를 경감하는 실용적 방식을 택했습니다."
대형 과학 프로젝트에서 '새로 짓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때, ITER는 이미 있는 것을 영리하게 재배치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비용 절감만이 아니라 이후 민간 기업 개방이라는 결정으로 이어지는 논리적 기반이 됩니다. 처음부터 공공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이 공공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일 하나당 시험에 걸리는 시간은 4~6개월입니다. TF07 코일의 시험이 끝나면 다른 TF 코일과 폴로이달 자기장 코일(PF1)이 차례로 들어올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ITER 코일 시험이 완료된 이후, 이 설비는 외부에 문을 엽니다.
게임체인저: 민간 핵융합 기업에 문을 열다
이 결정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지금 민간 핵융합 기업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핵융합 개발의 판도는 10년 전과 완전히 다릅니다. Commonwealth Fusion Systems, TAE Technologies, Xcimer Energy 같은 민간 기업들이 수억에서 수십억 달러의 민간 투자를 유치하며 독자적인 핵융합 장치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히 과학적 성과가 아닙니다. 2030년대 안에 실제로 전기를 생산하는 상업용 핵융합로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업들 모두 공통된 병목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초전도 자석입니다. 강력한 자기장을 만들기 위한 초전도 자석은 핵융합로의 핵심 부품이지만, 이것을 극저온 조건에서 실제로 시험할 수 있는 설비는 세계 어디에도 많지 않습니다. 새로 짓자니 수백억 원의 비용과 수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ITER의 냉각 시험 설비는 바로 이 병목을 해소할 수 있는 자산입니다.
ANS 2026 연간 콘퍼런스(덴버)에서 Xcimer Energy의 레이저 핵융합 시설 투어가 수주 전에 매진됐다는 사실은 민간 핵융합에 대한 업계의 폭발적 관심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관심은 기술적 진전의 실체가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Barabaschi 사무총장은 자신이 이끄는 ITER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는 ITER뿐 아니라 지식·인프라·운영 경험을 공유해 민간 핵융합 생태계를 지원하는 예시이기도 합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ITER는 35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공공 프로젝트입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초전도 기술, 극저온 공학, 자석 시험 운영 경험이 이 설비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민간 기업들이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인류가 핵융합 상업화를 위해 공동으로 투자한 자산이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입니다.
공공과 민간이 함께 움직일 때
ITER의 이번 결정은 핵융합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초 과학 인프라가 민간 혁신을 어떻게 가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초전도 자석 기술은 핵융합 외에도 MRI 의료 영상 장비, 입자 가속기, 차세대 양자 컴퓨팅에 폭넓게 쓰입니다. ITER에서 축적된 극저온 공학 데이터와 운영 경험은 이 모든 분야에 파급 효과를 미칩니다. 즉, 하나의 시험 설비가 여러 산업의 기술 발전을 동시에 밀어올리는 구조입니다.
핵융합이 정말 30년 후의 기술로 남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ITER라는 공공 프로젝트가 민간 기업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문을 열기로 한 것은 분명합니다. 수십 년을 쌓아온 공공의 지식이 민간의 속도와 만날 때, 그 결과가 어떤 모습일지 — 이것이 앞으로 핵융합의 미래를 결정할 가장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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