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세계 최초 SMR 수출 착공했다 — 한국은 왜 두 번 졌나

2026. 6. 9. 11:07원자력 뉴스

2026년 6월 5일, 우즈베키스탄의 Jizzakh 지역에서 작은 콘크리트 슬래브가 타설됐습니다. 방송에 크게 나오지 않았지만, 원자력 업계에서는 이 장면을 꽤 의미 있게 바라봤습니다. 세계 최초로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가 수출 착공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자연스럽게 한국에도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은 왜 이 자리에 없었을까요?


세계 최초 SMR 수출 착공, 그 실체는 무엇인가

러시아가 우즈베키스탄에 수출하는 SMR은 RITM-200N(출력 55MW)입니다. 이 설계는 원래 핵추진 쇄빙선에 탑재하기 위해 개발된 RITM-200을 육상 발전용으로 개량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북극 항로를 가르는 쇄빙선의 심장을 땅 위에 올려놓은 셈입니다.

이번 착공식에는 우즈베키스탄 미르지요예프 대통령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화상 연결로 공동 주관했으며,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 라파엘 그로씨(Rafael Grossi)가 직접 현장에 참관했습니다. IAEA 기준에 따라 퍼스트 콘크리트(first concrete), 즉 원자로 건물 기초에 처음으로 콘크리트를 붓는 행위는 해당 시설이 공식 '건설 중 원전' 지위를 얻는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RITM-200N 2기(합계 110MW)만 짓는 것이 아니라, 1,000MW급 대형로인 VVER-1000 2기와 함께 단일 부지에 통합 배치됩니다. 대형로와 SMR이 한 부지에서 나란히 들어서는 세계 첫 복합 원전 모델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이 목표하는 가동 시점은 2029년이며, 사업비는 기본 계약 기준 약 95억 달러(약 13조 원)입니다. 재원은 러시아의 국가 대출로 조달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기입니다. 러시아는 자국 야쿠트 지역에도 육상용 RITM-200N을 건설 중인데, 완공 예정이 2031년입니다. 수출 원전인 우즈베키스탄 쪽이 자국 실증보다 먼저 가동 목표를 잡은 것입니다. 이례적인 구도이지만, 그만큼 Rosatom이 수출 레퍼런스 확보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해, 한국은 카자흐스탄에서도 졌다

우즈베키스탄 착공식이 열리기 불과 일주일 전인 5월 28일, 카자흐스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푸틴 대통령의 국빈 방문 자리에서 카자흐스탄 최초의 원전인 발하쉬(Balkhash) 원전 건설 정부 간 협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VVER-1200 원자로 2기, 총 사업비 약 165억 달러(약 22조 원) 규모입니다.

이 수주 경쟁에는 중국 CNNC, 프랑스 EDF, 한국 KEPCO가 Rosatom과 함께 뛰었습니다. 2025년 6월 최종 결과가 나왔고, 선택받은 것은 Rosatom이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2024년 국민투표에서 70% 이상이 원전 건설에 찬성했을 만큼 분위기가 성숙한 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기술 부족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APR1400은 UAE 바라카 원전 4기를 모두 상업운전에 올린 검증된 설계입니다. 한국 원전의 기술력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이미 체코 Dukovany 수주 우선협상 등으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금융이 원전 수주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결정적이었을까요? 카자흐스탄 발하쉬 원전 협약을 들여다보면 답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Rosatom이 제시한 조건은 사업비의 85%를 러시아 국가 수출신용으로 조달하는 것이었습니다. 165억 달러 중 140억 달러를 러시아 정부가 빌려주는 구조입니다.

카자흐스탄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세계 최대 우라늄 생산국이지만, 소련 붕괴 이후 자국 내에 원전이 한 기도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원전을 짓는 나라가 수십조 원을 직접 조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때 "내가 돈도 빌려주고, 원전도 지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온다면, 기술 경쟁력이 비슷한 수준이라면 결론은 자연스럽게 기울어집니다.

우즈베키스탄 RITM-200N 프로젝트도 마찬가지 구조입니다. 95억 달러 사업비가 러시아 국가 대출 금융으로 조달됩니다. Rosatom은 반세기에 걸쳐 다진 중앙아시아와의 정치·외교·에너지 관계를 바탕으로, 금융 패키지를 원전 수출의 핵심 무기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Rosatom은 현재 40개국 이상에서 원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중 상당수는 해당국 사업비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 수출금융으로 충당하는 구조입니다.

 

한국의 경우, 수출입은행과 한국무역보험공사를 통한 금융 지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규모와 조건 면에서 러시아의 국가 대출 패키지와 직접 경쟁하기에는 구조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체코 Dukovany처럼 EU 회원국이 자체 금융 조달 능력을 가진 경우에는 한국의 기술 경쟁력이 전면에 나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융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SMR 수출 경쟁, 이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가 세계 최초 SMR 수출 착공 레퍼런스를 쥐게 됐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경쟁 지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아프리카 신흥 시장에서 Rosatom은 이제 "실제로 짓고 있는 SMR"을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반면 미국, 영국, 한국의 SMR들은 아직 인허가 또는 설계 완성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BWRX-300이 최종투자결정을 내렸고 기초 설치까지 진행됐지만, 실질적인 원자로 건설은 아직 초기 단계입니다. 이 간격이 신흥국 발주자 입장에서는 의사결정의 기준이 됩니다.

물론 Rosatom SMR에도 불확실성은 있습니다. RITM-200N의 육상 실증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출 착공을 먼저 했다는 점은 기술 리스크로 남아 있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러시아 원전 수출에 대한 지정학적 우려도 상존합니다. IAEA 그로씨 사무총장이 우즈베키스탄 착공식을 참관하며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했지만, 서방 금융기관의 자금 접근이 막혀 있는 현실은 Rosatom 수출 모델의 구조적 제약이기도 합니다.

결국 한국이 이 지형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기술 외의 영역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국가 차원의 수출금융 구조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시장에 집중할 것인가.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연달아 나온 이 두 가지 패배는 그 질문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습니다.

원전 수주는 더 이상 기술자들만의 경쟁이 아닙니다. 국가 금융의 총력전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