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9. 23:28ㆍ원자력 뉴스
유럽에 한국 원전을 짓겠다는 계약이 성사된 건 이미 지난해 일입니다. 그런데 계약서에 도장이 찍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닙니다. 경쟁에서 탈락한 쪽이 가만히 있을 리 없고, EU 차원의 규제 심사라는 변수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외부 장벽이 2026년 6월 5일 공식적으로 제거됐습니다.
EU가 들여다본 것은 무엇이었나
EU 집행위원회(EC)가 한국수력원자력(KHNP)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체코 두코바니 원전 APR-1000 2기 프로젝트의 입찰에서 탈락한 EDF(프랑스)가 EC에 이의를 제기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EDF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KHNP가 제시한 가격과 공사 지연·비용 증가 미발생 보장은 한국 정부의 불법 국가 보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에 EC는 EU의 외국보조금규정(FSR, Foreign Subsidies Regulation)에 근거하여 2025년 2월부터 예비 직권 심사에 착수했습니다. FSR은 2023년 발효된 비교적 새로운 규정으로, EU 역내 시장에서 외국 정부 보조를 받은 기업이 경쟁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EC에 부여합니다. 원전 수주라는 수백억 달러짜리 계약에 이 규정이 처음으로 적용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약 1년 4개월간의 예비 심사 끝에 EC가 내린 결론은 심층조사 불개시였습니다. KHNP 측이 제시한 두 가지 논거, 즉 ① 정부 보조금을 수취한 사실이 없고, ② 해당 입찰은 FSR 시행 이전에 개시되어 규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EC가 타당하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계약 규모가 말해주는 것
두코바니 프로젝트는 규모만으로도 이미 한국 원전 수출사에 기록될 사건입니다. APR-1000 2기, 계약 금액은 약 186억 달러(CZK 4,070억). 2024년 7월 체코 정부가 KHNP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2025년 6월 EPC(설계·조달·시공) 시공계약이 체결됐습니다. 착공은 2029년, 1호기 가동 목표는 2036년입니다.
여기에 체코 정부가 추가 2기 건설(테믈린 부지)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하면, 두코바니는 단순한 단일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한국 원전이 유럽이라는 가장 까다로운 시장에 발을 디딘 교두보입니다.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것은 KHNP만이 아닙니다. 두산에너빌리티·현대건설 등 한국 원전 공급망 전체가 함께 움직이는 '팀 코리아' 체제입니다. EDF의 법적 도전이 좌절된 것은 이 패키지 전체의 유럽 시장 경쟁력이 공식적으로 검증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남은 변수, 그리고 도미노 효과
한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EC의 이번 결정은 KHNP에 대한 FSR 조사 종결이지, 프로젝트 전체의 규제 심사 완료가 아닙니다. EC는 별도 절차로 체코 정부의 국가 보조(State Aid) 적정성에 대한 심층조사를 2026년 1월 이미 개시한 상태입니다. 이 조사는 체코 정부가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지원의 EU 경쟁법 적합성을 따지는 것으로, 결과에 따라 프로젝트의 금융 구조가 조정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FSR 종결의 파급 효과는 두코바니 한 곳에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이 유럽 원전 시장을 두드리는 다음 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폴란드, 루마니아, 네덜란드. 이들 국가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이번 EC 결정은 강력한 선례가 됩니다. "EU 집행위원회가 직접 심사했고,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은 협상 상대방의 가장 근본적인 의구심을 미리 해소해 줍니다.
더 넓게 보면, 한국 원전 수출 전략의 지형도 자체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두코바니로 유럽 입지를 확보한 KHNP는 2026년 3월 필리핀 마닐라전력(Meralco), 한국수출입은행과 3자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동남아 시장에도 발을 넓혔습니다. 체코 수주가 단순한 단건 계약이 아니라 글로벌 원전 수출 플랫폼의 기반석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전 수출이 복잡한 이유
원전 수출은 다른 산업의 수출과 다릅니다. 기술 경쟁력만으로 계약을 따내는 게 아닙니다. 수입국의 규제 체계, 금융 조달 구조, 지정학적 맥락, 그리고 이번처럼 국제 경쟁법의 적용 여부까지 맞물립니다. EDF가 FSR이라는 규제 수단을 활용해 경쟁자를 견제하려 했다는 사실은, 원전 수출 경쟁이 단순한 기술 경합이 아닌 복합적인 지정학·통상 게임임을 보여줍니다.
KHNP가 이 심사를 통과한 방식도 주목할 만합니다. 강하게 반발하는 대신, 팀 코리아 전체가 EC에 필요한 자료와 설명을 성실하게 제출했습니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성실한 협조의 결과"라고 평가한 것은 이 과정의 전략적 성격을 잘 요약합니다. 규제 심사를 돌파하는 것도 수출 역량의 일부입니다.
두코바니의 첫 삽은 2029년에 뜨일 예정입니다. 그 전까지 체코 국가 보조 심층조사 결과, 테믈린 추가 2기 계약 협상 개시 여부, 그리고 유럽 곳곳의 후속 입찰이 연이어 이어집니다. EU의 심사 통과는 끝이 아니라, 훨씬 길고 복잡한 여정의 시작점 확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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