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39년 만에 원자력으로 돌아온 이유 — 탈원전 역전의 공통 문법

2026. 6. 9. 11:25원자력 뉴스

"원자력은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닌가요?"

이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대개 2000년대 초반까지의 세계 흐름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체르노빌과 스리마일섬의 기억,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유럽 여러 나라에서 탈원전 바람이 불었던 것을 보면 그런 인상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2026년 현재, 세계 각지에서 그 흐름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역전되고 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이탈리아입니다. 2026년 6월 4일, 이탈리아 하원이 '지속가능 원자력 위임법'을 가결했습니다. 1987년 국민투표로 원전을 전면 폐쇄한 지 정확히 39년 만의 입법 조치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일까요? 그리고 이 역전은 이탈리아만의 이야기일까요?


39년 만의 귀환 — 이탈리아는 무엇을 결정했나

이탈리아는 원자력과 오랜 인연이 있는 나라입니다. 1960~70년대 서유럽 3위의 원자력 국가였지만, 1987년 체르노빌 사고 직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탈원전을 선택했습니다. 그 이후 이탈리아는 전력의 약 5%를 인접국의 원자력 발전 전력 수입에 의존해왔습니다. 원전은 없지만, 사실상 프랑스 원자력의 혜택을 누려온 셈입니다.

이번에 하원을 통과한 법안은 원전을 즉시 짓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에 1년 이내에 세부시행령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하는 '위임법(legge delega)'입니다. 세부시행령을 통해 SMR(소형모듈원자로, Small Modular Reactor)과 AMR(선진모듈원자로, Advanced Modular Reactor) 건설·운영 규정, 독립 핵안전청 설립, 방사성폐기물 관리 체계 등을 구체화합니다. 에너지장관 Pichetto는 2035년 핵발전 개시를 목표로 밝혔습니다.

찬성 155표, 반대 86표, 기권 8표. 결코 압도적이지 않은 숫자입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이제 상원의 최종 표결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Meloni 정부는 SMR과 핵융합 기술을 이탈리아 산업 경쟁력 회복의 핵심 수단으로 포지셔닝하고 있으며, Eni·Enel·Leonardo 같은 이탈리아 주요 에너지·방산 기업들도 원자력 부문 참여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시작했습니다.


탈원전 역전을 만든 세 가지 공통 문법

이탈리아만이 아닙니다. 일본, 그리고 미국의 여러 주(州)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이 역전에는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력 수요의 폭발적 증가입니다. AI 서버, 데이터센터, 전기차 충전, 반도체 공장 — 이 모든 것이 전기를 삼킵니다. 일본 경제산업성(METI)이 2026년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AI·데이터센터의 전기 수요가 2034년까지 약 3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Wood Mackenzie 분석). Oracle, Google, Microsoft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일본에 AI 인프라 투자를 쏟아붓는 상황에서 전력망이 압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역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태양광과 풍력으로 이 수요를 전부 채울 수 있다면 원자력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저부하(Baseload) — 날씨와 무관하게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전력 — 를 재생에너지만으로 충당하는 것이 기술적·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에너지 안보의 재발견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은 에너지 의존의 위험성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전력을 프랑스에서 수입하는 구조 역시 일종의 에너지 취약성입니다. 자국 내 안정적인 전력 생산 역량을 갖추는 것이 국가 안보 문제와 직결된다는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법안이 "EU 2050 탄소중립 정책 및 에너지 안보 목표 틀 내에서 추진"하도록 명시한 것은 이 맥락을 반영합니다.

세 번째는 기후 목표와의 연계입니다. 이번 이탈리아 법안의 공식 명칭이 '지속가능 원자력 위임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EU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는 수단으로 원자력이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독일이 2023년 탈원전을 완성하는 동안, 프랑스·폴란드·체코·네덜란드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왔고, 이제 이탈리아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보여주는 역전의 속도

이탈리아의 법안이 '방향 전환 선언'이라면, 일본의 움직임은 '속도'를 보여줍니다.

2026년 6월 5일, 일본 METI는 원자력 정책 패널에 2050년대까지 최대 14기의 노후 원자로를 차세대 원자로로 교체한다는 수치 목표를 처음으로 제시했습니다. 2040년대까지 2 ~ 5기, 2050년대까지 누계 11~14기(총 12.7 ~ 16 GW 규모)입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15년 만에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구체적인 신규 원전 건설 수치 목표를 내놓은 역사적 전환입니다.

일본 METI가 구체적인 수치 목표를 제시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구체적인 수치 목표 제시가 원자력 인력 확보와 산업 생태계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발언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탈원전의 비용은 단순히 발전소를 닫는 것이 아니라, 인력·기술·공급망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일본 원전 산업계는 30년 이상의 신규 건설 공백으로 설계·시공 능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입니다. 이번 수치 목표 발표는 "다시 짓겠다"는 선언이기 이전에, "산업 생태계가 사라지기 전에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절박함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역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39년의 공백은 기술과 인력을 모두 잠재운 세월입니다. 독립 핵안전청 설립과 "역량 개발" 의무화를 법안에 명시한 것은 그 공백을 메우겠다는 의지입니다.


이 흐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탈원전 역전은 이탈리아나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세 가지 힘 — AI 시대의 전력 수요 폭증, 에너지 안보의 재발견, 기후 목표와의 연계 — 이 동시에 압력을 가하는 상황에서 여러 나라가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번 흐름이 단순히 "원자력이 좋다 나쁘다"의 감정적 논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력 공급의 현실적 제약, 에너지 독립의 필요성, 탄소 감축 목표라는 세 가지 조건이 맞물리면서 각국 정부가 선택지를 재계산하고 있습니다.

이 계산의 결과는 나라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39년 만에 이탈리아 하원 의사당에서 열린 표결, 후쿠시마 이후 처음으로 일본 정부가 구체적 수치로 제시한 원자로 교체 목표 — 이 두 가지 사건은 원자력을 둘러싼 세계의 계산이 바뀌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흐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자력은 이미 끝난 이야기"라는 전제는 2026년의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