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발등에 불 떨어진 이유 — SMR 한국 아웃소싱 논란이 보여주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2026. 6. 16. 03:04원자력 뉴스

"영국산 비율 70%"라는 약속을 내건 나라가, 막상 원자로 핵심 부품을 한국에 맡기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자국 산업을 키우겠다고 큰소리쳤던 정부가 정작 중요한 부분은 외국에 외주를 준 셈이니, 영국 내에서 "이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논란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단순히 영국 정치권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SMR(소형모듈원자로, Small Modular Reactor) 공급망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면이 드러납니다. 오늘은 이 사건이 왜 벌어졌고, 한국의 원전 제조업이 그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영국이 약속한 "70% 영국산"은 왜 못 지켜질 위기에 놓였나

영국 정부는 Rolls-Royce SMR이 웨일스 앵글시(Wylfa) 지역에 SMR 3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프로젝트 가치의 70%를 영국 내 기업이 담당하도록 한다는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일자리 창출과 국내 제조업 부흥이라는 명분이 걸린 만큼, 이 숫자는 단순한 참고치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Rolls-Royce SMR이 이 SMR의 핵심 원자로 부품을 한국에 아웃소싱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국 의회에서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원 비즈니스·무역위원회 위원장인 노동당 의원 리암 번(Liam Byrne)은 이 결정이 70% 영국산 공약과 어떻게 부합하는지 정부에 서면으로 따져 묻겠다고 예고했습니다. 한편 폴크스톤 앤드 하이스 지역구의 토니 본(Tony Vaughan) 의원은 지역 핵발전소인 던지니스(Dungeness)의 재가동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이는 지역 차원에서 영국의 핵에너지 공급 불안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점이 있습니다. "원자로 핵심 부품"이라고 하면 단순한 철판이나 배관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압력용기처럼 극한의 온도와 압력을 견뎌야 하는 대형 정밀 단조·용접 구조물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부품은 만들 수 있는 설비와 기술을 갖춘 기업이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습니다. 즉, "어디서 만드느냐"의 선택지가 애초에 넓지 않다는 뜻입니다. 영국이 정치적으로는 자국 비율을 높이고 싶어도, 실제로 그 수준의 정밀 제조 역량을 갖춘 곳이 국내에 충분하지 않다면 공약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 — 원전 제조 경쟁력의 실체

이번 논란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국이 왜 약속을 못 지켰는가"보다는 "왜 한국이 선택되었는가"입니다. 이 논란은 두산에너빌리티와 KEPCO E&C 같은 한국 원전 제조사의 경쟁력이 글로벌 SMR 공급망에서 필수 공급자로 부상하고 있는 신호로 해석합니다.

Rolls-Royce SMR 한국 아웃소싱 논란은 영국 SMR 프로젝트의 '국산화' 목표와 공급망 현실 사이의 괴리를 드러냄 — 한국 원전 제조 경쟁력(두산에너빌리티, KEPCO E&C)이 글로벌 SMR 핵심 부품 시장에서 필수 공급자로 부상하고 있는 신호.

 

이 해석을 이해하려면, 원전 부품 제조가 왜 진입장벽이 높은 산업인지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자로 압력용기나 증기발생기 같은 핵심 부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형 단조 설비, 정밀 가공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수십 년간 누적된 품질 인증 이력이 필요합니다. 한 번 부품에 결함이 생기면 원자로 전체의 안전성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발주처는 "처음 만들어보는 곳"에 쉽게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즉 트랙 레코드(과거 시공·품질 실적) 자체가 진입장벽인 산업입니다.

한국은 1970년대부터 원전을 꾸준히 건설하고 운영해 온 나라이고, 그 과정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이 대형 원전 부품을 안정적으로 생산해 온 실적을 쌓아왔습니다. 영국이 굳이 한국을 선택한 배경에는 이런 누적된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번 논란은 영국 산업 정책의 모순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한국 원전 제조업의 위상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할 만큼 높아졌다는 역설적인 증거인 셈입니다.

 

이 사건이 한국에 던지는 진짜 질문 — 우연이 아닌 흐름

이번 한국 아웃소싱 논란을 영국 한 나라의 일회성 에피소드로 보면 큰 그림을 놓치게 됩니다. context.json에 담긴 6월 15일 브리프를 보면, 같은 시기에 한국과 관련된 다른 움직임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먼저 영국과 일본은 Rolls-Royce, 영국국립핵연구소(UKNNL), 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JAEA) 3자가 고온가스로(HTGR, High Temperature Gas-cooled Reactor) 기술과 차세대 코팅입자연료 공동개발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이 기술은 7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운전되며, 철강 생산이나 그린수소 제조처럼 산업 현장에 직접 열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경수로형 SMR과는 다른 시장을 노립니다.

또한 미국의 신생 농축기업 General Matter는 미국 수출입은행(Ex-Im Bank)으로부터 최대 42억 달러 규모의 잠재적 금융 지원을 확인받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과 한국 유틸리티에 농축우라늄(LEU)을 공급하는 장기 계약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수력원자력 입장에서 보면, 기존에 Urenco·Orano·KHNP NF에 의존하던 농축우라늄 공급망에 새로운 미국 공급선이 추가되는 셈입니다.

브리프는 이 세 가지 흐름 — 영·일 HTGR 협력, 미국의 일·한 LEU 공급 계획, 그리고 Rolls-Royce SMR의 한국 아웃소싱 — 을 묶어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영국 HTGR AMR MOU(JAEA 협력), Urenco USA-General Matter의 일·한 LEU 공급 계획, Rolls-Royce SMR 한국 아웃소싱 3중 구도는 원자력 분야에서 한국의 제조·연료·수출 역할이 동시에 확대되는 복합 신호다.

 

세 사건이 같은 날짜의 브리프에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원자력 산업은 한 번 공급망 관계가 형성되면 수십 년간 유지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설계 승인, 품질 인증, 운영 경험이 쌓이면서 신뢰가 축적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이 SMR 핵심 부품 공급자로, 그리고 동맹국의 원전 연료 공급 파트너로 거론되는 흐름은, 앞으로 수십 년간 이어질 원전 공급망 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사안입니다.

물론 이는 한국 입장에서 단순히 '좋은 소식'으로만 받아들일 일은 아닙니다. 브리프 역시 "한국 정부 원전 수출 전략과 연계 필요"라고 짚고 있는 만큼, 이런 기회를 실제 수주와 산업 성장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차원의 전략적 대응이 함께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번 영국발 논란을 단순히 "남의 나라 정치 싸움"으로 흘려보내기보다는, 한국 원전 제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어떤 좌표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로 읽어본다면, 앞으로 비슷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그 의미가 조금 더 또렷하게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