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전 산업의 격상 — 부품 공장에서 기술 파트너·투자자로

2026. 6. 17. 00:15원자력 뉴스

한국이 원전을 수출한다는 뉴스는 이제 새롭지 않습니다. UAE 바라카 원전이 그 출발점이었고, 이후 체코·폴란드·루마니아 등지에서 한국 수주 소식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2026년 6월에 연달아 터져 나온 소식들은 그보다 한 차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의 차세대 원자로 공급망에서, 단순히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사가 아니라 기술 파트너이자 투자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진 걸까요? 그리고 이것이 왜 중요한가요?


HD현대가 미국 차세대 원자로의 핵심 부품을 만든다

2026년 6월 14~15일, TerraPower와 HD현대가 Natrium 원자로 봉입계통 부품의 선호 제조사(Preferred Manufacturer) 계약을 정식으로 확정했습니다. 2025년 3월 전략적 제조 협력 MOU를 체결한 지 약 15개월 만에 실제 계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Natrium은 미국 테라파워(TerraPower)가 개발한 345MWe급 소듐냉각 고속로입니다. 소듐냉각 고속로란, 물 대신 액체 소듐을 냉각재로 사용하며 핵분열 연쇄반응을 빠른 중성자로 제어하는 차세대 원자로입니다. 여기에 몰텐솔트 에너지저장계통을 결합해 전력 출력을 최대 500MWe까지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기존 원자로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와이오밍 주 케머러에는 이미 2026년 4월 공식 착공이 완료됐고, Meta가 2035년까지 최대 8기 계약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HD현대는 이 Natrium 원자로에서 원자로 봉입계통(Reactor Enclosure System), 즉 원자로 핵심 구조물을 감싸는 금속 격납 구조물을 제작하게 됩니다. 이 부품은 원자로의 안전성과 구조 건전성을 직접 좌우하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HD현대는 계약 확정 전 제조 타당성·비용 경쟁력·납기 일정에 관한 공동 연구를 이미 마쳤습니다. 한국 중공업 역량이 미국 첨단 원자로 시장에서 검증을 통과했다는 의미입니다.


KHNP가 TerraPower의 주주가 됐다는 것의 의미

같은 시기, 또 다른 소식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2026년 1월, 한국수력원자력(KHNP)이 SK이노베이션이 보유하던 TerraPower 지분 일부를 인수했습니다.

KHNP는 한국의 원전 운영을 총괄하는 공기업입니다. 이 기관이 미국의 비상장 첨단 원자력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기술 협력을 넘어섭니다. 주주로서 기술 접근권을 확보하고, 나아가 Natrium 기술의 한국 배치를 논의하는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이를 두고 단순한 지분 취득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TerraPower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 기업들의 역할 분담을 보면 그림이 명확해집니다. HD현대는 핵심 구조물 제조를 맡고, KHNP는 운영 노하우와 투자자로 참여하며, KBR은 엔지니어링을 담당합니다. 서로 다른 역량을 가진 한국 기업들이 미국 선진원자로 생태계 안에서 분업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선진원자로 기업에 대한 한국 공기업의 직접 투자 선례가 생겼다는 점에서, 이후 한국 기업들의 미국 원자력 R&D 기업 지분 참여 확대의 시발점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해양 원자력에서도 선점 위치를 확보하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미국 해사청(MARAD)이 2026년 5월 7일 발표한 상업 선박용 SMR(소형모듈원자로) 개발 정보 요청서(RFI) — 8월 5일 응답 마감 — 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HD현대중공업과 KAERI(한국원자력연구원)는 영국 로이드 레지스터(Lloyd's Register)로부터 MSR(용융염 원자로) 탑재 자동차운반선(PCC)에 대한 AIP(선형 설계 기본 승인)를 획득했습니다. AIP란 선박 설계의 기술적 타당성을 선급(선박 안전을 검증하는 국제 인증기관)이 검토·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ABS(미국 선박 검사기관)도 MIT·HD현대·Capital Maritime이 공동으로 제안한 핵추진 화물선 설계에 AIP를 부여했습니다.

MARAD RFI는 미국 상업 선박에 SMR을 탑재하는 실현 가능성과 공급망을 탐색하는 절차입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해양 지배력 복원' 행정명령과 연계되어 있으며, 미국 해안경비대(USCG)는 2025년 12월 해양 원자력 정책 부서를 신설해 규제 체계 구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1959~1971년 운항한 N.S. 사바나(Savannah) 이후 60년 만에 상업 핵추진 선박 시장을 재창출하려는 시도인 셈입니다.

HD현대·KSOE가 설계 단계에서 이미 국제 인증을 받아두었다는 것은, 입찰 경쟁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다른 참가자들보다 몇 걸음 앞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품 공장에서 기술 파트너·투자자로

이 세 가지 흐름 — Natrium 부품 제조 계약, TerraPower 지분 인수, 해양 SMR AIP 선취 — 을 한 자리에 놓고 보면, 공통된 방향이 보입니다.

한국 원전 산업의 글로벌 위치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역할이 "설계는 미국·유럽이 하고, 우리는 납기와 가격 경쟁력으로 부품을 공급한다"는 구조였다면, 지금은 그 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HD현대는 미국 첨단 원자로의 핵심 구조물을 제작하는 주체이고, KHNP는 그 기술 기업의 주주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도 영국 Rolls-Royce SMR 부품 수주로 비슷한 방향의 격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G7 에비앙 정상회의(2026년 6월 15~17일) 논의에서도, KHNP가 G7 원전 국제 협력 파트너로 참여하는 여지가 확인됐습니다. 원자력 강국 클럽이 한국을 동반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있습니다. MARAD RFI는 아직 시장 탐색 단계이고, TerraPower Natrium은 와이오밍 케머러에서 첫 삽을 뗐을 뿐입니다. 계약이 실제 매출로, 지분이 실제 기술이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변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합니다.

한국이 미국의 차세대 원자로 공급망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로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산업 뉴스가 아닙니다. 에너지 안보와 기술 주권이라는 차원에서, 앞으로 한국의 협상력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