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7. 00:16ㆍ원자력 뉴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2026년 초, 그 상상이 현실이 됐습니다. 일본은 LNG 수입이 급감하며 전력 공급에 위기를 맞았고, 한국도 에너지 수급 경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기술이 있습니다. 바로 핵추진 선박입니다. 연료를 싣지 않아도 달리는 배. 해협이 봉쇄되어도 멈추지 않는 배. 60년 전 한번 열렸다가 닫혔던 그 문이, 지금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한번 시도했다가 사라진 기술
핵추진 선박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닙니다. 1959년 미국은 N.S. Savannah라는 상업용 핵추진 화물선을 진수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혁신의 상징이었고, 세계 여러 나라도 비슷한 시도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971년 Savannah는 운항을 멈췄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기름이 쌌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힐 것이라고 아무도 진지하게 상정하지 않았습니다. 연료 공급망이 끊길 리 없다는 전제 위에서, 핵추진의 경제성은 재래식 선박에 비해 명백히 불리했습니다. 반응로 건조·유지 비용이 훨씬 높았고, 항구 입항 규제는 복잡했으며, 승무원 훈련도 까다로웠습니다. 결국 기술은 군함의 영역으로만 남게 됐습니다.
그 판단이 틀렸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2026년의 세계는 그 전제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호르무즈가 막히면, '연료 없는 배'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전 세계 LNG 교역량의 약 20%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합니다. 일본, 한국, 대만처럼 에너지를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나라들에게 이 해협은 사실상 생명선입니다. 이번 이란전쟁으로 그 생명선이 흔들리자, 각국은 에너지 안보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핵추진 선박의 핵심 장점은 연료 보급 없이 수십 년을 운항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소형 모듈 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 — 기존 대형 원자로의 수십 분의 일 크기로 선박에 탑재 가능한 소형 원자로)를 동력원으로 삼으면, 화물선은 LNG 터미널에 들를 필요가 없습니다. 호르무즈가 막혀도, 수에즈가 통제되어도, 연료 가격이 폭등해도 배는 달립니다. 이것이 에너지 안보 위기 속에서 핵추진 선박이 다시 등장한 이유입니다.
물론 현재 경제성은 여전히 도전적입니다. 하지만 에너지 안보 리스크를 비용으로 환산하기 시작하면 셈법이 달라집니다. '연료가 없어 배가 서는 상황'의 비용은 연료 자체 비용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60년 만에 다시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2026년 5월, 미국 해사청(MARAD)은 상업 선박용 SMR 개발에 관한 정보 요청서(RFI)를 발표했습니다. 오는 8월 5일이 응답 마감입니다. 이 RFI는 단순한 아이디어 수집이 아닙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해양 지배력 복원' 행정명령과 연계된 정책 행동이며, 미국 해안경비대(USCG)는 이미 2025년 12월 해양 원자력 정책 부서(Maritime Nuclear Policy Division)를 신설해 제도적 기반을 다지고 있습니다.
MARAD가 산업계에 묻는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효율(항속거리와 속도 향상 가능성), 비용(연료비 제거 효과), 국가안보(공급망 강화), 확장성(전체 선단에 적용할 수 있는 모델). 이 질문들이 무엇을 겨냥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경제성이 아니라 전략적 필요성을 먼저 보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국제 선급(선박 안전 기준을 인증하는 기관)들의 움직임입니다. 영국의 Lloyd's Register는 HD현대중공업과 KAERI(한국원자력연구원)가 공동 설계한 용융염 원자로(MSR) 탑재 자동차운반선에 AIP(Approval in Principle, 기술 원칙 승인)를 부여했습니다. 미국선급협회(ABS)도 MIT·HD현대·Capital Maritime이 공동 설계한 핵추진 화물선에 같은 승인을 내렸습니다. 설계 원칙의 안전성을 국제 기관이 공식 인정한 것입니다.
한국이 선점하고 있는 위치
이 흐름에서 한국의 위치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HD현대중공업과 KSOE(한국조선해양)는 AIP 획득을 통해 글로벌 해양 원자력 시장에서 기술적 선점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MARAD RFI 응답 기한(8월 5일)을 앞두고 글로벌 조선·원자력 기업들이 포지셔닝을 서두르는 상황에서, AIP를 이미 받아둔 것은 입찰 경쟁력에서 결정적 차이를 만듭니다.
상업 선박이 필요로 하는 추진력은 통상 10~80MW 수준입니다. 이는 소형 SMR이나 마이크로 원자로가 담당할 수 있는 범위입니다. 같은 시기 한국 조선업은 TerraPower의 Natrium 원자로(소듐냉각 고속로 — 소듐을 냉각재로 쓰는 4세대 원자로) 핵심 부품 제조사로도 선정됐습니다. 육상 원자로 제조 역량이 해양 원자력 진출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8월 하순, 워싱턴 D.C.에서는 IAEA가 해양 원자력 이니셔티브인 'ATLAS'를 각료급 회의와 함께 공식 출범시킬 예정입니다. 국제 원자력 기구가 직접 해양 핵추진 표준화를 이끈다는 신호입니다. 그 논의의 테이블에 한국이 AIP와 제조 계약을 손에 쥐고 앉게 될 것입니다.
60년 전과 지금, 무엇이 달라졌나
N.S. Savannah가 운항을 멈춘 1971년과 지금 사이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첫째, 소형 모듈 원자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당시의 선박용 원자로는 군함 수준의 대형 시스템이었지만, 지금은 선박 엔진룸에 탑재할 수 있는 규모로 설계가 가능해졌습니다. 둘째, 에너지 안보가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닌 국가 생존의 문제로 격상됐습니다. 셋째, 탄소 배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핵추진은 '무탄소 선박'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됐습니다.
항구 입항 규제와 선원 훈련의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상업 핵추진 선박이 내일 당장 항구를 가득 채울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는 것은 그 '언젠가'의 조건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규제 틀이 세워지고, 설계 원칙이 인증되고, 제조 역량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호르무즈 봉쇄는 그 작업의 속도를 눈에 띄게 앞당겼습니다.
연료가 필요 없는 배는 단순한 기술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특정 해협의 지정학적 위기가 에너지 공급망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한 세계가, 그 취약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선택하기 시작한 경로입니다. 다음에 궁금해질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핵추진 선박의 안전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표준을 누가 먼저 장악하는가.
'원자력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HALEU, 차세대 원자로의 꿈을 가로막는 연료 공급망의 함정 (0) | 2026.06.18 |
|---|---|
| AI 데이터센터가 불러온 원전 수명연장 붐 (0) | 2026.06.18 |
| 한국 원전 산업의 격상 — 부품 공장에서 기술 파트너·투자자로 (1) | 2026.06.17 |
| 핵폭탄에서 청정에너지로 — 플루토늄 34톤의 재탄생 (0) | 2026.06.17 |
| 인류 최초의 핵폐기물 영구 처분장, 핀란드 Onkalo가 열린다 (0) | 2026.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