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20. 00:21ㆍ원자력 뉴스
발트해 연안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를 아시나요? 인구 약 130만 명, 면적은 우리나라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의회가 지난 6월 18일, 역사적인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바로 「원자력에너지안전법(Nuclear Energy and Safety Act, NESA)」입니다.
원전 하나 짓겠다는 나라의 이야기가 왜 주목받을까요? 이 결정에는 에스토니아만의 사정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에너지 지형이 얼마나 빠르게 바뀌고 있는지가 압축돼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토니아가 원전법을 만든 이유
에스토니아 의회(Riigikogu)는 NESA를 63대 1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은 대통령 서명 후 2027년 1월 1일 발효될 예정입니다.
에스토니아가 원전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에스토니아를 포함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은 오랫동안 구소련 시절 구축된 전력망 시스템, BRELL(벨라루스·러시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연계 전력망)에 연결돼 있었습니다. 발트 3국은 2025년 2월 BRELL에서 공식 분리해 유럽 본토 전력망(Continental European Network)에 합류했습니다. 러시아 전력망에서 물리적으로 끊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러시아산 가스와 전력 의존에서 벗어나면서, 안정적인 기저전력(24시간 중단 없이 공급하는 전력)을 어디서 확보할 것인지가 현실적인 숙제가 됩니다. 에스토니아가 원전을 선택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입니다.

NESA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NESA는 에스토니아에 원전이 생기기 이전부터 필요한 모든 법적 틀을 담은 법률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 내용을 규정합니다.
▲ 부지 선정·건설·시험·운영·해체·폐기물 처분까지 단계별 허가 체계. ▲ 2027년 1월 소비자보호기술규제청(CTPA) 산하에 핵규제기관 출범. ▲ 운영자 책임 규정 및 해체기금(Decommissioning Fund) 설치 의무화. ▲ 국제 세이프가드(핵물질 불법 전용 방지 감시 체계) 이행 원칙.
특히 눈에 띄는 조항이 있습니다. NESA는 도입할 수 있는 원자로 기술을 "실증된 기술(Proven Technology)"로 한정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신형 원자로 기술은 사실상 배제하는 것입니다. 이 조항은 이미 설계 인증을 받았거나 운영 실적이 있는 기술에 경쟁 우위를 줍니다.
아울러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최종 결정할 때 의회 승인을 의무화했고, 국민투표 회부 가능성도 규정에 포함됐습니다. 정치적 민주성을 법률 절차 안에 담은 것입니다. 실제 법안에 10명이 반대표를 던졌고 국민투표 조항이 포함됐다는 점에서 정치적 변수는 남아 있습니다.

BWRX-300, 왜 이 원자로인가
에스토니아는 원전 후보 기술로 GE Vernova Hitachi Nuclear Energy의 BWRX-300을 선택한 상태입니다. Fermi Energia라는 민간 기업이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BWRX-300은 300MWe급 비등수형 자연순환 SMR(소형모듈원전)입니다. 비등수형 원자로(BWR)란 원자로 안에서 직접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기존 GE의 비등수형 원자로 기술을 기반으로 설계를 단순화한 모델로, 자연순환 방식을 채택해 별도의 냉각재 펌프 없이도 중력과 열대류만으로 원자로를 식힐 수 있습니다. "전기 없이도 스스로 냉각된다"는 수동 안전 계통이 핵심입니다.
에스토니아가 필요로 하는 원전 규모는 600MWe급입니다. BWRX-300 두 기를 나란히 세우면 이 규모를 충당할 수 있습니다. NESA 통과로 Fermi Energia는 부지 지정계획(DSP) 2단계 및 사전평가 신청을 2029년 중반에 제출할 수 있는 법적 경로를 확보했습니다.
유럽 SMR 확산의 도미노가 시작되는가
에스토니아 한 나라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파장은 그 이상입니다.
에스토니아는 발트 3국 중 원자력 관련 법령을 갖춘 첫 번째 나라가 됩니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같은 에너지 안보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에스토니아가 BWRX-300 도입의 실제 경로를 만들어낸다면, 인근 국가들의 원전 정책 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더 넓게 보면, BWRX-300은 이미 체코, 폴란드, 슬로베니아 등 중·동부유럽 여러 나라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기술입니다. GE Vernova Hitachi 입장에서 에스토니아는 유럽 레퍼런스를 확보하는 교두보입니다. "실증된 기술"만 허용한다는 NESA 조항은, 역설적으로 BWRX-300처럼 인증 경로를 밟고 있는 기술에게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탈러시아 에너지 전환을 서두르는 유럽에서, 원전은 더 이상 이념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에너지 안보 수단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NESA 통과는 그 흐름의 작지만 상징적인 한 지점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에스토니아 뉴스를 다시 보신다면, 단순한 소국의 선택이 아닌 유럽 에너지 지형 변화의 한 조각으로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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