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23. 22:30ㆍ원자력 뉴스
원자력 발전소 수출이라고 하면 기술과 안전 인증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앞 단계, 즉 누가 먼저 그 나라의 문을 두드리느냐가 결정적입니다. 2026년 6월, 미국 에너지부(DOE)가 태국에 대해 원자력 기술 수출을 대폭 간소화했다는 소식은 그래서 단순한 행정 절차의 변화가 아닙니다. 동남아 원전 시장에서 누가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탄입니다.

'Part 810'이라는 빗장을 풀다
미국 기업이 해외에 원자력 기술을 지원하거나 수출하려면 DOE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 근거 법령이 10 CFR Part 810으로, 사실상 미국 원자력 기술 수출의 관문입니다. 허가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개별 허가(specific authorization)는 건별로 DOE 승인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이고, 일반 허가(general authorization)는 사전 승인 없이 보고 의무만 이행하면 됩니다.
2026년 4월 13일, 크리스 라이트 DOE 장관이 태국을 일반 허가 대상국 목록에 추가하는 결정서에 서명했습니다. 태국은 이로써 51번째 일반 허가 대상국이 됐습니다. 이 결정이 6월 16~22일 공표되자 업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유가 있습니다. 태국과 미국은 이미 123 협정(평화적 원자력 협력 협정)을 체결한 상태입니다. 여기에 Part 810 간소화까지 더해지면서, Westinghouse·GE Vernova Hitachi·NuScale 같은 미국 원자력 기업들은 행정 절차 없이 태국에서 기술 지원·컨설팅·교육 활동을 즉각 시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쉽게 말해, 미국은 경기 시작 전에 이미 유니폼을 갈아입고 경기장에 들어선 셈입니다.

태국이 왜 중요한가 — 동남아 원전 시장의 특수성
태국은 상업용 원전을 운영해 본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원전 수출 경쟁의 핵심 무대로 꼽히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태국의 전력 공급에서 천연가스의 비중은 약 60%에 달합니다.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단일 에너지원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AI 산업·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가 예고된 상황에서 에너지 다변화가 정책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태국 에너지당국(EGAT)이 SMR(소형모듈원자로, 출력 300MWe 이하의 소형 원자로로 건설 기간과 비용이 기존 대형 원전보다 유리함) 타당성 조사를 진행 중인 것도 이 맥락입니다.
더 넓게 보면, 동남아 전체가 비슷한 상황입니다.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주요국들이 2030~2040년대 전력 수요 급증에 대비해 원전 도입을 검토하거나 추진 중입니다. 기존 대형 원전보다 투자 규모가 작고, 전력망이 분산된 섬나라 지형에도 적합한 SMR이 이 시장에서 주목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동남아 SMR 시장은 2030년대 원전 수출의 최대 격전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에게 남은 시간은
이 경쟁에서 한국의 위치는 어떨까요. 한국수력원자력(KHNP)은 APR1400(대형 원전)으로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을 성공적으로 건설한 실적이 있고, 차세대 소형 원자로인 i-SMR(혁신형 소형 모듈 원자로, 170MWe급)의 국내 실증 부지로 부산 기장이 확정됐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이번 Part 810 조치가 시사하는 바는 기술 경쟁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일반 허가 조치를 통해 태국 내에서 기술 지원과 인력 교육을 즉각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원전 수출에서 실질적 이점을 가져다줍니다. 현지 전문가를 먼저 교육하고, 규제 체계 수립을 지원하며, 의사결정자들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 — 이른바 '락인(lock-in) 효과'가 수주전 시작 전에 이미 형성되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에도 경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미 원자력 협력 채널을 활용해 미국 기업과 공동 수출 전략을 검토하거나, KHNP가 독자적으로 태국·인도네시아 등과의 정부 간 협력(IGA)을 조기에 체결하는 방안이 있습니다. 태국 EGAT의 SMR 타당성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2026~2027년 공식 입찰 요청(RFP)이 나오기 전까지의 시간이 한국에게는 핵심 준비 기간입니다.
DOE 라이트 장관은 Part 810 조치의 목적에 대해 "미국의 혁신가들이 새 시장에서 앞서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 DOE NNSA, 2026년 6월
경쟁의 지도는 이미 그려지고 있습니다
태국 원전 시장을 둘러싼 경쟁자는 미국만이 아닙니다. 프랑스 EDF(EPR2), 중국 CNEA(화룽1), 러시아 Rosatom(VVER) 모두 동남아 원전 시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각국이 정부 차원에서 수출 지원 외교를 병행하는 상황에서, 기술 인증과 트랙 레코드(실적)만큼 중요한 것이 '먼저 들어가 있는 자'의 이점입니다.
한국 i-SMR이 아직 국내 실증 단계에 있다는 현실적 제약을 감안하면, 태국 시장에서의 기회 창구는 생각보다 짧을 수 있습니다. 기술이 준비되어도 시장이 이미 닫혀 있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동남아 SMR 시장에서 한국의 위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결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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