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23. 22:24ㆍ원자력 뉴스
국민이 결정한 것을 의회가 바꿀 수 있나?
2017년, 스위스 국민은 직접 투표를 통해 신규 원전 건설을 금지했습니다. 직접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꼽히는 나라에서, 국민이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2026년 6월 18일, 스위스 연방 의회가 이 금지 조항을 의결로 폐지했습니다. "의회가 국민투표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능합니다. 스위스 연방 헌법 체계에서 국민투표로 확정된 사안이라도 연방 의회는 법률 개정을 통해 이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번 의결에 반발하는 측, 즉 녹색당(Greens)은 즉각 국민투표(referendum) 청구를 선언하며 100일 이내에 5만 명 서명 수집에 착수했습니다. 결국 최종 결정은 다시 국민의 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번 의회 의결은 끝이 아니라, 다음 라운드의 시작입니다.

왜 지금, 어떻게 이 결정이 나왔나?
이번 의결은 "스톱 더 블랙아웃(Stop the Blackout)"이라는 국민 발의에서 시작됐습니다. 국민 발의(Volksinitiative)란 스위스에서 일정 수 이상의 서명을 모아 국민투표에 부치는 제도입니다. 이 발의의 취지는 간단했습니다. 겨울철 전력 수급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원자력 옵션을 다시 열어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연방 의회는 이 발의를 직접 가결하는 대신, 정부 대안(counterproposal)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정부 대안이란 발의의 취지를 수용하되 표현이나 범위를 조율한 의회안입니다. 이 대안이 2026년 6월 18일 하원(국민의회, Nationalrat)에서 최종 가결됐고, 상원(각주의회, Ständerat)은 이미 찬성 27, 반대 13으로 이를 통과시킨 상태였습니다. 의회 양원이 모두 찬성했다는 사실은 이 결정이 소수 강경파의 선택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연방의원들은 재정 조달이 확보된 경우에만 신규 원전 허가를 부여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원전 건설을 무조건 허용하는 게 아니라, 경제성이 증명된 사업에 한해서만 가능하다는 현실적 안전장치입니다.

그렇다면 스위스에 곧 새 원전이 들어서나?
기대와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주요 에너지 기업 Axpo Holdings는 이번 금지 해제가 "상징적"이며 당장 신규 건설 계획은 없다고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의회가 문을 열었다고 해서 바로 삽을 꽂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위스 폴 셰러 연구소(Paul Scherrer Institute)의 안드레아스 파우츠 소장은 규제 절차를 고려할 때 실제 건설은 2040년 이전에 시작하기 어렵다고 평가했습니다. 환경 영향 평가, 부지 선정, 안전 인허가 등 원전 건설에 수반되는 행정 절차는 수십 년 단위로 진행됩니다. 즉, 이번 결정의 의미는 '즉각적 건설 착수'가 아니라 '미래 옵션의 복원'입니다. 스위스는 현재 베즈나우(Beznau) 1·2호기, 괴스겐(Gösgen), 라이프슈타트(Leibstadt) 등 4기의 원전을 가동 중이며, 이 기존 원전들이 한동안 스위스 전력 공급의 핵심을 담당할 것입니다.
스위스 에너지부 장관 알베르트 뢰스티는 "장기 에너지 공급 보장을 위해 원자력 옵션을 열어 두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정책의 방향성은 분명합니다. 지금 당장 짓겠다는 것이 아니라, 2040~2050년 이후를 대비해 선택지를 닫아두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유럽 에너지 정책의 더 큰 흐름 속에서
스위스의 결정은 고립된 사건이 아닙니다. 2022년 EU는 지속 가능한 금융 분류 체계인 택소노미(Taxonomy)에 원자력을 포함시켰습니다. 원자력이 친환경 투자 범주에 들어간다는 공식 인정이었습니다. 2026년 6월에는 에스토니아가 원자력법을 통과시켰고, 스웨덴은 2025~2026년에 걸쳐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에 대한 국가 지원 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SMR이란 기존 대형 원전보다 훨씬 소규모이고 표준화된 모듈 방식으로 건설하는 차세대 원전 개념입니다.
반면 독일은 2023년에 마지막 원전 3기를 폐쇄하며 탈원전을 완료했습니다. 스위스와 독일은 국경을 맞댄 이웃 나라이지만, 에너지 정책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갈라선 셈입니다. 이 대비는 유럽 에너지 정책에 단일한 정답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각국이 자국의 에너지 안보와 기후 목표를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결정이 진짜 의미하는 것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시작된 유럽의 탈원전 물결은 15년이 지난 지금 분기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스위스 의회의 이번 결정은 "원전을 다시 짓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원전 없이 미래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현실 인식의 표현입니다.
녹색당의 국민투표 청구로 인해 이 논쟁은 다시 스위스 국민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원자력은 이미 끝난 논쟁이 아닙니다. 에너지 안보, 탄소 중립, 전력 수급 안정이라는 세 가지 과제가 동시에 압박하는 시대에, 원자력 옵션을 둘러싼 논의는 유럽 전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원자력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미국이 선수를 쳤습니다 — 동남아 SMR 시장, 한국 KHNP에게 남은 시간은? (0) | 2026.06.23 |
|---|---|
| 착공 9개월 만에 핵임계: 마이크로원자로가 다시 쓰는 '원자력 개발 상식' (0) | 2026.06.23 |
| 바다 위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원자력 — 미국이 규제 관문을 열었습니다 (0) | 2026.06.20 |
| 미국 대학 원자로가 멈출 수도 있다 — Idaho 협약이 만든 핵연료 로지스틱스 병목 (0) | 2026.06.20 |
| 연방은 밀고, 지방은 등 돌린다 — 캐나다 SMR 정책의 딜레마 (0) | 2026.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