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공 9개월 만에 핵임계: 마이크로원자로가 다시 쓰는 '원자력 개발 상식'

2026. 6. 23. 22:26원자력 뉴스

원자력발전소를 짓는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오랜 시간'일 것입니다. 규제 승인에만 수년, 실제 건설에 또 수년. 그 긴 여정이 원자력 기술의 숙명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2026년 6월, 캘리포니아의 한 스타트업이 착공 9개월 만에 핵임계(nuclear criticality)를 달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기술 뉴스를 넘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핵임계란 무엇이고, 왜 9개월이 놀라운가?

핵임계란 원자로 내에서 핵분열 연쇄반응이 자립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외부에서 에너지를 주입하지 않아도 반응이 스스로 지속되는 시점입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엔진에 처음으로 시동이 걸리는 순간과 같습니다. 모든 원자로는 이 순간을 통과해야 비로소 전력 생산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에 임계를 달성한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 엘세군도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 Valar Atomics의 'Ward 250'입니다. 100 kWt(킬로와트 열출력)급 헬륨 냉각 마이크로원자로로, 연료는 TRISO(Tri-structural ISOtropic) 입자 연료를 사용합니다. TRISO는 핵연료를 세라믹 여러 겹으로 감싼 형태로, 고온에서도 연료가 새어 나오지 않는 구조적 안전성이 특징입니다. 실험은 유타주 에머리 카운티의 USREL(Utah State Research Extreme Laboratory) 부지에서 2026년 6월 18일에 이루어졌으며, '영출력(zero-power) 핵임계'로 진행됐습니다. 영출력 임계란 연쇄반응이 자립되는지 확인하되, 열을 거의 발생시키지 않는 매우 낮은 출력 조건에서 진행하는 실험입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6월 22일에는 10 kWt의 실질적인 열출력을 기록하며 전력 생산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착공부터 임계까지 9개월. 기존 대형 원자력발전소의 개발 일정과 비교하면 이는 수십 분의 일에 불과한 시간입니다.

규제가 바뀌었다: 9개월을 가능하게 한 조건

빠른 속도의 배경에는 기술만이 아닌, 규제 체계의 변화가 있습니다. DOE(미국 에너지부)의 RPP(Reactor Pilot Program, 원자로 파일럿 프로그램)가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RPP는 소형·마이크로 원자로 개발을 가속화하기 위해 DOE가 민간 기업과 협력하여 빠른 설계 검토와 부지 제공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Ward 250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DOE로부터 2026년 2월에 예비 설계안전분석(PDSA, Preliminary Design Safety Analysis) 승인을, 4월 말에는 문서화 안전분석(DSA, Documented Safety Analysis) 승인을 받았습니다. 두 번의 안전 심사를 두 달 남짓 간격으로 통과한 것입니다. 기존의 규제 절차가 수년에 걸쳐 이루어졌던 것과는 다른 속도입니다. 이번 임계 달성은 RPP 참여 원자로 가운데 국립연구소 외부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같은 프로그램의 선행 사례인 Antares Nuclear의 Mark-0(나트륨 히트파이프 냉각 방식, 500 kWt급)가 6월 4일 INL(아이다호 국립연구소) 부지에서 임계를 달성한 데 이어 두 번째 성과입니다.

여기에 정치적 드라이브도 더해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EO 14301은 2026년 7월 4일까지 최소 3개 시험로의 임계 달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후보로는 INL 부지의 Oklo Aurora가 지목되고 있습니다.

 

헬륨 냉각과 TRISO: 왜 이 조합인가?

Ward 250가 선택한 헬륨 냉각 + TRISO 연료 조합은 마이크로원자로 설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헬륨은 화학적으로 비활성 기체입니다. 냉각재가 방사성 물질과 반응하거나 부식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을 냉각재로 쓰는 기존 경수로와 달리, 고압 유지와 냉각재 누출 시의 복잡한 안전 설계를 피할 수 있습니다.

TRISO 연료 역시 고온 환경에서의 안전성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각 연료 입자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격납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극단적인 사고 시나리오에서도 방사성 물질의 방출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술의 결합은 냉각 실패 시 자연적으로 반응이 중단되는 수동안전 특성과도 연결됩니다. 물리 법칙이 안전을 보장하는 설계입니다.

Ward 250의 상용화 목표는 5 MWe(메가와트 전기출력)입니다. 대규모 전력망이 닿지 않는 섬, 군 시설, 오지 지역에 독립적인 전력을 공급하는 시장을 겨냥한 수치입니다. 도서 지역에 대형 발전소를 지을 수 없지만, 소형 원자로 하나면 마을 전체의 전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레이스의 의미: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RPP에는 현재 11개 프로젝트가 참여 중입니다. Aalo Atomics, Deep Fission, Last Energy, Natura Resources, Radiant Industries, Terrestrial Energy 등 다양한 민간 기업들이 각기 다른 설계 방식으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Atomic Alchemy는 Oklo에 인수되어 합류했습니다. 이 레이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민간의 속도와 규제 혁신이 만나면, 원자력 개발의 상식적인 타임라인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TRISO 연료 수요 증가로 이어질 것입니다. 마이크로원자로 실증이 잇따를수록, TRISO 연료 공급망의 확장은 필수 과제가 됩니다. 한국의 KAERI(한국원자력연구원)도 소형로와 마이크로로 분야에서 기술 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미국의 민간 주도 가속화는 이 경쟁 구도에 새로운 변수를 더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기술의 새로운 장은, 대형 국책 사업이 아니라 민간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형태로 열리고 있습니다. 9개월이라는 숫자가 단순한 기록이 아닌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