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배터리가 온다 — 우주·심해·AI를 위한 전원 패러다임 전환

2026. 6. 26. 04:01원자력 뉴스

태양광 패널이 닿지 않는 심해 수천 미터 아래, 영하 수십 도의 달 표면, 인터넷도 없는 북극 관측소. 이런 곳에서 수년간 전기를 공급해야 한다면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요? 재래식 배터리는 금방 방전되고, 태양광은 빛 자체가 없습니다. 바로 이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환경'을 위해 수십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온 기술이 있습니다. 방사성동위원소 전원장치, 줄여서 RPS(Radioisotope Power System)입니다. 그리고 2026년, 이 기술이 민간 시장에서 새로운 산업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원자력배터리란 무엇인가 — '붕괴열'을 전기로 바꾸는 원리

RPS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방사성 물질이 스스로 붕괴하면서 내는 열을 전기로 변환하는 장치입니다.

방사성 물질은 아무런 조작 없이도 자연적으로 원자핵이 붕괴하면서 열을 냅니다. 이 열을 열전소자(thermoelectric element)가 전기로 바꾸는 것이 기본 원리입니다. 핵분열 반응처럼 폭발적인 에너지 방출이 아니라, 서서히 꺼지지 않는 열원처럼 작동한다고 보면 됩니다. 마치 오래 타는 장작난로와 비슷하지만, 연료를 교체할 필요 없이 수년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릅니다.

NASA가 보이저 1·2호, 카시니, 뉴호라이즌스 등 수십 년을 날아가는 심우주 탐사선에 RPS를 탑재해온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태양광은 쓸 수 없고, 재충전도 불가능한 환경에서 RPS만이 안정적인 전원을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Zeno Power와 Vallecitos — 민간 원자력배터리 시대의 첫 공장

2026년 6월 18일, 미국 원자력배터리 스타트업 Zeno Power가 캘리포니아 서놀(Sunol)에 위치한 Vallecitos 원자력센터에 RPS 제조시설을 설립한다고 발표했습니다.

Vallecitos는 단순한 공업용지가 아닙니다. 약 647헥타르에 달하는 이 부지는 1957년 미국 최초의 민간 원전이 운전을 시작했던 역사적 장소입니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발급한 최초의 민간 원전 면허 번호 1호를 받은 비등수형 원자로(BWR)가 바로 이곳에서 가동되었습니다. Zeno Power는 이 부지의 역사적 핫셀(hot cell) 인프라를 복원하는 방식으로 시설을 구축합니다.

핫셀(hot cell)이란 방사성 물질을 안전하게 다루기 위해 두꺼운 차폐벽과 원격 조작 장비를 갖춘 특수 실험·제조 공간입니다. 원자력배터리 제조의 핵심 인프라로, 이를 새로 짓는 것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Zeno Power는 원자력 해체 전문기업 NorthStar Group Services와 파트너십을 맺고, 이 역사적 핫셀 설비를 재활용하여 개발 속도를 높이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가 첫 10기 이상의 원자력배터리 핵심 하드웨어 공동 제작 파트너로 참여합니다. 웨스팅하우스는 세계 최대 원전 기업 중 하나로, 이 협력은 Zeno Power의 기술력에 대한 산업계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누가 사용하는가 — 해군 심해 작전에서 달 탐사까지

Zeno Power의 초도 생산 제품은 스트론튬-90(Sr-90) 연료 기반 RPS로, 우선 해저 적용을 목표로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미 국방부(DoD)의 DEPTHS 프로그램 — 심해 센서 네트워크와 자율 수중 드론(UUV) 충전에 투입됩니다. 해저 수천 미터에서 배터리를 교체하거나 케이블로 전기를 공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RPS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솔루션입니다.

Zeno Power는 이미 국방부(DoD)와 NASA로부터 6천만 달러 이상의 계약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2026년 정부 고객 초도 납품, 2028년 본격 양산이 목표입니다.

우주 분야에서도 진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메리슘-241(Am-241) 연료 RPS를 병행 개발 중이며, NASA 아르테미스 달 임무용 RPS는 2026년 4월 최종 설계 검토(FDR)를 마쳤습니다. 아르테미스 임무는 달 남극 부근에 장기 거점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달 표면은 약 2주 주기로 낮과 밤이 교차하며 밤에는 태양광을 전혀 활용할 수 없습니다. RPS는 이 긴 달 밤을 버티는 핵심 전원입니다.

Am-241 연료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프랑스 핵연료 기업 Orano와 우선 공급 협정도 체결했습니다. 또한 미 에너지부(DOE) 오크리지 환경관리(EM) 오피스와 협력하여 기존 레거시 Sr-90 RPS 장치(BUP-500)에서 연료를 재추출·재활용하는 작업도 진행 중입니다. 새로 만들기 어려운 방사성 동위원소를 기존 장치에서 회수해 활용하는 방식으로,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입니다.


왜 지금인가 — RPS 르네상스의 배경

RPS 기술 자체는 새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민간 기업이 앞다투어 뛰어들고 있을까요?

첫째, 수요의 다양화입니다. 과거에는 NASA와 군 등 극소수의 수요처만 있었지만, 지금은 심해 자원 탐사, 북극 기후 관측, 달·화성 탐사 상업화, 심지어 AI 데이터센터의 원격 전원 수요까지 가세하고 있습니다. 전기가 닿지 않는 곳 어디서나 안정적 전력을 원하는 수요가 늘고 있습니다.

둘째, 정책 환경입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명령 14302(EO 14302, 미국 원자력 르네상스)는 국내 원자력 공급망 강화를 명시적으로 지원하며, RPS 국산화도 이 흐름 안에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의 RPS 생산 역량은 사실상 정부 독점의 소규모 체제였는데, 민간 경쟁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정책 방향입니다.

셋째, 공급망 문제의 현실화입니다. RPS 핵심 연료인 플루토늄-238(Pu-238)의 생산량 한계로 NASA 임무에도 차질이 생겼던 역사가 있습니다. 다양한 동위원소(Sr-90, Am-241)로 연료를 다변화하고, 레거시 장치에서 연료를 재활용하는 접근은 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마무리

수십 년간 소수의 탐사선과 군 장비에만 적용되었던 원자력배터리 기술이 지금 본격적인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Zeno Power의 Vallecitos 공장 설립은 그 상징적인 첫 걸음입니다. 태양광이 닿지 않고, 케이블을 연결할 수도 없고, 수년간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 — 이런 '불가능한 조건'에서 전기를 공급하는 문제를 인류는 아직 제대로 풀지 못했습니다. 원자력배터리는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술입니다. 우리가 달에 거점을 만들고, 심해를 탐사하고, AI 인프라를 어디서든 가동하려는 시대가 가까워질수록, 조용히 타오르는 이 작은 열원의 가치는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