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에 AI를 쓴다: 예측정비부터 지식전수까지

2026. 6. 29. 13:31원자력 뉴스

AI가 원전을 운영한다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자율주행차도 사고를 내는 시대에, 방사성 물질을 다루는 원전을 AI가 다룬다는 이야기가 불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는 그런 공상과학 시나리오와는 조금 다릅니다. AI는 원전의 주인이 아니라 조용한 보좌관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26년 3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주관한 RIC 2026 컨퍼런스에서 원전 업계와 규제기관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원전 감독·검사 체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그 대화 속에서 AI 활용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현장 실무자들이 "지금 이렇게 쓰고 있고, 앞으로는 이런 데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방식으로요.


AI가 원전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

현재 원전 현장에서 AI가 가장 활발하게 쓰이는 분야는 예측정비(Predictive Monitoring)입니다. 예측정비란, 설비가 고장 나기 전에 이상 징후를 미리 파악해서 선제적으로 정비하는 방식입니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타이어가 펑크 나기 전에 공기압 저하 추이를 보고 미리 교체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원전에는 수천 개의 센서가 붙어 있습니다. 펌프, 밸브, 배관, 전기 계통 등 주요 설비마다 온도·압력·진동·전류 등의 데이터가 쉼 없이 기록됩니다. 과거에는 이 방대한 데이터를 사람이 일일이 분석하거나 정해진 주기마다 점검하는 방식으로 관리했습니다. 하지만 수만 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사람의 눈으로 다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AI는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설비 이상을 조기에 예측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번 컨퍼런스에서도 평가되었습니다.

설비 건전성 분석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설비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데이터에 기반해 판단하는 일이 AI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이는 원전 안전과 직결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필요한 정비를 줄이고 운영 효율을 높이는 데도 기여합니다.


AI가 넘보는 다음 영역: 운영경험과 지식전수

원전 산업이 AI에 기대를 거는 또 다른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운영경험(Operating Experience) 관리지식전수(Knowledge Transfer)입니다.

운영경험이란, 원전을 운영하면서 쌓인 모든 사건·이슈·교훈의 기록을 말합니다. 어떤 설비가 어떤 상황에서 고장 났는지, 어떻게 조치했는지, 유사 사례가 다른 발전소에서도 있었는지 같은 내용이 수십 년치 문서로 쌓여 있습니다. 미국만 해도 수십 기의 원전이 수십 년간 운영되었으니, 그 데이터의 양은 어마어마합니다.

문제는 이 귀한 정보를 필요한 순간에 꺼내 쓰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문서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담당자가 비슷한 사례를 찾으려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NEI(미국 원자력에너지협회)는 바로 이 분야에서 AI를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AI가 방대한 운영경험 데이터를 빠르게 검색하고, 현재 상황과 관련성 높은 사례를 골라서 담당자에게 제시해 준다면, 의사결정의 속도와 질이 모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지식전수 문제는 원전 산업이 수십 년째 고민하는 과제입니다. 원전은 장기간 운영되는 시설이고, 숙련된 운전원과 기술자들이 은퇴하면서 그들의 암묵적 지식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 큰 우려였습니다. AI가 이 암묵적 지식을 체계화하고, 신규 인력이 빠르게 습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습니다. 단순한 매뉴얼 데이터베이스를 넘어, 경험자가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판단한다"는 식의 노하우를 AI가 학습해 전달하는 구조입니다.


검사 준비, 규제 현장에서도 AI가 열리고 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눈에 띈 또 하나의 언급은 검사 준비(Inspection Preparation) 분야의 AI 활용입니다. 원전 사업자는 NRC 검사를 앞두고 방대한 문서와 기록을 검토해야 합니다.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지적사항이 있다면 어떻게 처리했는지, 검사관이 요구할 수 있는 자료가 준비되어 있는지를 점검하는 과정은 상당한 시간과 인력이 필요합니다.

AI가 이 과정을 지원할 수 있다면, 사업자는 검사 준비에 드는 행정 부담을 줄이고 실질적인 안전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NRC도 현재 감독·검사 체계를 전반적으로 효율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검사 및 출장 통합 대시보드 구축으로 연간 약 700시간을 절감한 사례처럼, 디지털 도구 활용이 규제 현장에서도 이미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AI는 원전의 안전을 위협하는가, 강화하는가

AI를 원전에 쓴다고 하면 "그게 오작동하면 어떡하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 질문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현재 원전에서 AI가 쓰이는 방식은 중요한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AI는 정보를 제공하고 이상을 알리는 역할을 할 뿐, 원전의 핵심 안전 기능 — 제어봉 삽입, 냉각재 공급, 비상 정지 등 — 은 기존의 검증된 시스템이 그대로 담당합니다.

예측정비에서 AI가 "이 펌프에 이상 징후가 있습니다"라고 알려줘도, 최종 판단과 조치는 숙련된 기술자가 내립니다. 운영경험 검색에서 AI가 관련 사례를 추려줘도, 그 사례를 어떻게 적용할지는 사람이 결정합니다. AI는 판단의 속도와 정확도를 높이는 도구이지, 판단 자체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도 AI 활용 확대 전망과 함께, 안전 기준 완화 없이 위험도 중심으로 자원을 배분하겠다는 원칙이 일관되게 강조되었습니다. AI 도입도 이 원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더 잘 보고, 더 빠르게 알아채고, 더 현명하게 판단하기 위한 수단으로요.

원전과 AI의 관계는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예측정비와 운영경험 분석에서 시작된 이 흐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앞으로의 경험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전이 아무 생각 없이 AI를 들여쓰는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안전이 먼저고, 기술은 그 다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