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왜 SMR 공급망의 70%를 자국 기업에 돌렸나 — Rolls-Royce 와일파 프로젝트의 전략을 읽다

2026. 6. 29. 22:49원자력 뉴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할 때 가장 먼저 오가는 질문 중 하나는 "그래서 우리나라 기업들도 참여할 수 있나요?"입니다. 원전 프로젝트는 토목·기계·전기·소재 분야를 아우르는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움직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가 공급망을 장악하느냐는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기술 주권과 직결됩니다. 2026년 6월 영국에서 나온 발표 하나가 바로 그 질문의 답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70% 영국산" — 숫자 하나에 담긴 정책 의지

2026년 6월 24일, 영국의 국영 원전 개발사인 GBE-N(Great British Energy – Nuclear)은 와일파(Wylfa) SMR 프로젝트에 집행한 계약 총액이 9억 파운드(약 1조 6천억 원)에 근접했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숫자는 하나입니다. 전체 계약의 70% 이상이 영국 등록 기업에 돌아갔습니다.

이는 GBE-N이 애초부터 목표로 설정한 기준, 즉 "SMR 선단(fleet·복수 호기 묶음) 가치의 70% 이상을 영국 내에서 조달한다"는 방침을 실제로 이행한 결과입니다. Rolls-Royce SMR 역시 2021년 출범 이후 공급망에 집행한 금액 중 3억 파운드 이상을 영국 기업에 지불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70%라는 수치는 단순한 '애국 구매' 캠페인이 아닙니다. 이 숫자의 배경에는 두 가지 논리가 맞물려 있습니다.

첫째, 공급망을 먼저 잡는 쪽이 표준을 쥔다. SMR(소형 모듈 원자로·Small Modular Reactor)은 기존 대형 원전과 달리 핵심 모듈을 공장에서 제작해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입니다. 공장 생산이 중심이 되면, 처음 모듈을 설계하고 제작한 기업의 사양이 사실상 글로벌 표준으로 굳어집니다. 영국이 자국 기업을 초기에 대거 참여시킨 것은, SMR 시대의 표준을 영국 산업이 주도하게 만들려는 포석입니다.

둘째, 규모의 경제가 단가를 결정한다. Rolls-Royce SMR은 이미 영국 외에도 체코(CEZ와 계약, 최대 3GW)에서 복수 호기 계약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유럽에서 두 개 이상의 국가에서 복수 플릿 계약을 보유한 SMR 기업은 현재 Rolls-Royce SMR뿐입니다. 발주량이 쌓일수록 모듈 단가는 내려가고, 단가가 내려갈수록 추가 수출 계약이 빨라집니다. 영국 공급망은 그 선순환의 첫 번째 고리입니다.


Pioneer Works — 제조센터가 말하는 것

공급망 전략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2026년 4분기 개소 예정인 Pioneer Works입니다. 영국 더비(Derby)에 세워지는 이 제조개발센터는 1,200만 파운드(약 220억 원)를 투입해 첨단 용접·시험·정밀 조립 설비를 갖추고, 고숙련 일자리 약 40개를 창출합니다.

규모만 보면 소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Pioneer Works의 역할은 단순한 제조 공간이 아닙니다. Rolls-Royce SMR은 이 시설을 영국과 해외 공급을 동시에 지원하는 거점으로 설계했습니다. 다시 말해, 체코와 그 이후에 추가될 국가들의 수주 물량도 이 센터를 통해 공급망에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용접과 정밀 조립은 원자력 분야에서 단순 기술이 아닙니다. 원자로 압력 용기나 배관 계통은 일반 산업 기준보다 훨씬 엄격한 규격과 품질 인증을 요구합니다. Pioneer Works는 바로 그 고부가 영역의 기술 역량을 영국 내에 축적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향후 Rolls-Royce SMR이 추가 국가에 수출하더라도, 핵심 기술과 부가가치는 영국에 남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 원전 기업에 주는 시사점

와일파 프로젝트는 영국 정부의 2050년 24GWe 원전 목표의 출발점이자 기준점(benchmark)이 됩니다. 이 프로젝트가 중요한 이유는 영국 내 의미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영국 시장 진입은 특화 기술 없이는 어렵습니다. GBE-N과 Rolls-Royce SMR의 70% 현지 조달 목표가 달성된 이상, 비영국 기업이 이 공급망에 들어가려면 영국 기업이 보유하지 못한 특화 기술이나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전제 조건입니다. 한국 원전 기업들이 가진 강점, 예컨대 고출력 밸브·펌프·계측 제어 분야의 경쟁력이 실제로 차별점으로 작동하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Pioneer Works는 접촉 채널이 될 수 있습니다. 2026년 4분기 개소하는 이 제조센터는 Rolls-Royce SMR의 해외 공급망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한국 기업들이 영국 공급망 참여를 탐색하는 실질적인 접촉 지점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습니다.

모듈 단가 하락은 경쟁을 심화시킵니다. Rolls-Royce SMR이 영국·체코 복수 플릿으로 대량 생산의 임계 수량에 근접할수록 모듈 단가는 낮아지고, 이는 한국형 SMR이나 다른 설계들과의 가격 경쟁도 격화된다는 뜻입니다. 공급망 참여와 별개로, 한국 SMR 설계의 독자 경쟁력을 어떻게 포지셔닝할지에 대한 전략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와일파는 결국 원자력 산업에서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집니다. 기술을 가진 쪽이 표준을 만들고, 표준을 만든 쪽이 공급망을 장악합니다. 영국이 70%라는 숫자로 만들어낸 것은 단순한 계약 통계가 아니라, 다음 세대 원자력의 산업 지형도를 미리 그려놓은 청사진입니다. 그 지형도를 읽는 것이 지금 원전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