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7. 1. 04:42ㆍ원자력 뉴스
소형모듈원자로, 흔히 SMR(Small Modular Reactor)이라고 부르는 차세대 원전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원자로 자체에 시선이 쏠립니다. 어떤 냉각재를 쓰는지, 출력이 얼마인지, 안전성은 어떻게 입증됐는지가 관심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소식 하나는 이 익숙한 그림을 살짝 비틀어 놓습니다. 원자로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전력망 기자재를 만드는 회사가 SMR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소식입니다. 왜 송전 회사가 원자로 회사와 손을 잡았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SMR 산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를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합의했나
스웨덴의 납냉각 SMR 개발사 Blykalla(블뤼칼라)와 일본 히타치그룹의 전력 계열사인 Hitachi Energy(스위스 본사)가 2026년 6월 29일, 차세대 납냉각 첨단모듈원자로(Advanced Modular Reactor, AMR — 기존 SMR보다 더 진보된 냉각재·설계를 적용한 모듈형 원자로를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배치를 위한 장기 전략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두 회사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Blykalla는 SEALER라는 이름의 원자로를 설계하는 회사로,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는 노심과 액체납 냉각 계통을 다룹니다. 반면 Hitachi Energy는 원자로를 만들지 않습니다. 변전소, 송전선, 전력 변환 장비처럼 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를 그리드(grid, 전력망)에 실어 보내는 기자재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즉 이번 협력은 "원자로를 누가 더 잘 만드느냐"의 경쟁이 아니라, "원자로에서 나온 전기를 전력망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연결하느냐"는, 지금까지 SMR 업계에서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영역에서 이뤄진 합의입니다.

SEALER 원자로의 핵심 기술은 무엇인가
Blykalla의 SEALER 원자로를 이해하려면 먼저 액체납 냉각이라는 방식부터 짚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원전은 물을 냉각재로 쓰지만, 액체납 냉각로는 녹은 납 금속을 냉각재로 사용합니다. 물보다 훨씬 높은 온도에서도 끓지 않고, 압력을 가하지 않아도 되는 특성 덕분에 설계를 단순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액체납에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었습니다. 뜨겁게 녹은 납이 원자로 내부의 금속 구조물을 서서히 부식시키는 문제입니다. Blykalla가 SEALER 원자로에서 내세우는 핵심 기술이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알루미늄합금강 소재를 활용해 액체납의 부식성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뜨거운 액체 금속 속에서도 잘 녹슬지 않는 특수 강철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냉각재의 장점은 살리면서 약점이었던 부식 문제를 소재 기술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번 협력의 출발점에는 이미 검증을 거친 핵심 기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드 통합이라는, 잘 보이지 않던 숙제
원자로가 아무리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설계되더라도, 거기서 생산된 전기가 기존 전력망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발전소로서 제 역할을 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MOU에서 양사가 공동으로 최적화하기로 한 영역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송전망 연계 설계, 부지 내 전력계통, 디지털 모니터링을 포함한 전력·계통 통합 설계가 협력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이 협력을 통해 Hitachi Energy는 자사의 전력기자재·솔루션을 SMR 표준 패키지 안에 통합할 수 있게 됩니다. 풀어서 말하면, SEALER 원자로를 도입하는 고객이 변전 설비나 전력 변환 장치를 별도로 조달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원자로와 함께 묶인 표준 패키지로 받아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자로 한 기 한 기를 새로 지을 때마다 전력망 연계 방식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했던 비효율을 줄이는 접근입니다. 그동안 원자로 자체에 집중됐던 SMR 산업의 관심이 그리드 통합·전력변환이라는 주변 인프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 이번 협력이 보여주는 흐름입니다.
왜 지금, 미국과 유럽을 동시에 노리는가
양사는 이번 협력의 목표 시장을 유럽 및 미국으로 명시했습니다. 두 시장을 동시에 겨냥하는 전략은 우연이 아닙니다. Blykalla는 지난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와 사전인허가(pre-application, 정식 인허가 신청에 앞서 규제기관과 설계의 기술적 쟁점을 미리 협의하는 절차) 협의를 개시했고, 미국의 또 다른 SMR 개발사인 Oklo와도 기술협력 MOU를 체결한 바 있습니다. 본국인 스웨덴에서도 행보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Blykalla는 이달 초 노르순데트(Norrsundet) 부지에 SEALER 원자로 6기를 배치하는 첨단원자로단지 건설을 위한 정부 재정지원을 신청했습니다.
Hitachi Energy의 참여는 전력기자재 대기업이 SMR 생태계에 본격 진입하는 신호로, 그동안 원자로 자체에 집중됐던 SMR 산업의 관심이 그리드 통합·전력변환 등 주변 인프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웨덴 정부 지원 신청, 미국 NRC 사전인허가, Oklo와의 협력, 그리고 이번 Hitachi Energy와의 MOU까지 한데 놓고 보면 하나의 그림이 드러납니다. 원자로 설계 하나만 들고 시장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인허가·자금조달·전력망 연계라는 사업화의 각 단계마다 적합한 파트너를 미리 확보해 두는 전략입니다. 원자로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를 실제 발전소로 완성하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다각적 파트너십 구축은 합리적인 선택지로 보입니다.
이 흐름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
전력기자재 대기업이 SMR 생태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SMR을 둘러싼 부가가치 사슬이 원자로 제작을 넘어 훨씬 넓게 펼쳐져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드 통합·전력변환 분야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영역인데, Hitachi Energy 같은 글로벌 전력기자재사의 진입은 SMR 전력계통의 표준화를 앞당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Blykalla가 보여준 미국·유럽 동시 인허가 추진 전략은 한국의 i-SMR(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해외 수출 전략을 고민할 때도 참고할 만한 사례입니다. 하나의 시장에서 인허가를 마친 뒤 다음 시장으로 넘어가는 순차적 접근 대신, 복수 국가의 규제기관과 동시에 절차를 밟아나가는 방식은 시간과 비용 모두에서 이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액체금속냉각 첨단모듈원자로 기술경쟁에서 스웨덴과 미국의 협력축이 강화되는 이번 흐름은, 국내 액체금속냉각로 연구개발이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되짚어보게 만듭니다.
원자로 회사의 이름만 좇다 보면 놓치기 쉬운 변화입니다. 전력망을 다루는 회사가 원자로 생태계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SMR이 실험실의 기술에서 실제로 전력망에 연결되는 발전소로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릅니다. 이 다음에는 어떤 분야의 회사가 SMR 생태계에 합류할지, 그 흐름을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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