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7. 1. 04:45ㆍ원자력 뉴스
석탄화력 발전소가 문을 닫은 자리는 보통 철거되거나 오랫동안 방치됩니다. 굴뚝은 무너지고, 부지는 흉물로 남고, 한때 지역 경제를 떠받치던 일자리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영국 잉글랜드 동중부의 작은 마을 Cottam(코텀)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옛 석탄화력 부지에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 — 기존 대형 원전을 공장에서 모듈 단위로 미리 제작해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의 소형 원자로) 최대 4기를 짓겠다는 제안서가 영국 정부에 막 제출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석탄발전소 부지가 원자력 발전소로 바뀔 수 있는지, 그리고 이 사례가 왜 한국의 원전 수출 전략에도 곱씹어볼 만한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왜 하필 옛 석탄발전소 자리일까요
미국 원자력 기업 Holtec International(홀텍 인터내셔널)과 영국 EDF Energy(EDF 에너지)는 2026년 6월 29일, Cottam 부지에 Holtec의 SMR-300 노형 최대 4기, 합산 약 1.3GW(기가와트) 규모를 배치하는 공동 제안서를 영국 정부에 제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두 회사는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합작법인(JV)도 함께 설립했습니다.
Cottam은 옛 석탄화력 발전소가 있던 자리이며, 지금은 가스화력 발전소가 가동 중인 곳입니다. 이 입지 선택의 핵심은 기존 송전망 인프라를 그대로 재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발전소를 새로 지을 때 가장 큰 비용과 시간이 드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송전선로와 변전 설비입니다. 이미 수십 년간 대규모 발전소가 가동되며 구축해놓은 송전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지라면, 새 원전을 짓는 데 드는 부대비용과 인허가 기간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화력발전소가 사라지며 비어 있던 송전 용량이 원전을 위한 자산으로 다시 쓰이는 셈입니다.
이 제안은 영국 정부의 Advanced Nuclear Framework(첨단원자력프레임워크)라는 제도를 활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민간 투자, 이미 검증된 원자로 기술, 기존 발전 인프라, 그리고 영국이 오랫동안 쌓아온 원전 운영 경험을 한데 묶어 시장 주도형으로 신규 원전을 배치하도록 설계된 정책 틀입니다. 정부가 원전을 직접 발주하기보다, 민간 기업이 검증된 기술과 적합한 부지를 찾아 제안하면 정부가 이를 검토하는 구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인허가 절차는 어디까지 와 있나요
원전을 새로 지으려면 설계 자체가 해당 국가의 안전 기준을 충족하는지 검증받아야 합니다. 영국에서는 이를 일반설계평가(Generic Design Assessment, GDA)라고 부르는데, 특정 부지가 아니라 원자로 설계 자체의 안전성·보안성·환경적합성을 사전에 심사하는 절차입니다. Holtec은 최근 SMR-300에 대한 GDA를 완료했습니다. 이는 Cottam 부지 건설을 위한 규제상의 기반이 이미 마련됐다는 의미입니다. 설계 심사를 통과한 노형이라면, 이후 개별 부지에 대한 인허가 절차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Cottam이 SMR-300의 첫 배치 사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미국 미시간주 Palisades(팰리세이즈) 부지에 짓는 "Pioneer(파이오니어)" 2기로, 현대건설과의 합작으로 추진 중이며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현재 환경영향평가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즉 같은 설계의 원자로가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서 동시에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는 셈입니다.
Holtec 사장 Rick Springman은 "EDF와의 오랜 파트너십과 영국 첨단원자력프레임워크가 결합해 Cottam SMR-300 배치를 위한 견고한 기반이 마련됐다"며 "Holtec은 영국 사업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며, 영국 내 원자력 기자재 제조공장 설립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EDF UK 최고경영자 Simone Rossi 역시 "Cottam 프로젝트는 영국의 원자력 용량 확대 목표를 지원하며, 석탄산업 유산이 깊은 지역의 대규모 재개발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같은 설계를 여러 나라에 반복해서 짓는다는 것
Holtec이 미국 Palisades와 영국 Cottam에 같은 SMR-300 설계를 동시에 추진하는 방식은 업계에서 fleet model(플릿 모델, 표준설계 복수국 반복배치 전략)이라고 부릅니다. 항공기 제조사가 같은 기종을 여러 항공사에 반복 판매하며 생산 단가를 낮추듯, 원자로도 한번 검증된 표준설계를 국가만 바꿔가며 반복해서 짓는 방식입니다.
원전은 부지마다 설계를 새로 바꾸면 그때마다 인허가 심사와 시공 학습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거쳐야 합니다. 반면 동일한 설계를 반복 배치하면 한 번 확립한 안전성 입증 자료와 시공 경험을 다음 부지에도 활용할 수 있어, 공사비와 공기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Holtec의 미국·영국 동시 추진은 이 fleet model이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가늠할 초기 시험대가 될 전망입니다. 표준화를 통한 비용 절감 효과가 입증된다면, 이는 후속 수출 확대를 노리는 다른 원전 개발사들에도 참고할 만한 모범 사례가 될 것입니다.
영국 SMR 시장에는 이미 자국 기업인 Rolls-Royce SMR이 GBE-N Wylfa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Holtec·EDF의 Cottam 제안이 더해지면서, 영국 SMR 시장은 단일 벤더 체제에서 복수 벤더가 경쟁하는 구도로 전환되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한국의 SMR 수출 전략은 무엇을 참고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독자 SMR 노형인 i-SMR을 개발하며 해외 수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Holtec·EDF의 Cottam 사례는 몇 가지 구체적인 시사점을 던집니다.
첫째, 부지 선정 전략입니다. 옛 화력발전소 부지를 활용하면 송전망 재활용과 지역사회 수용성이라는 두 가지 이점을 동시에 얻을 수 있습니다. 화력발전소가 있던 지역은 이미 발전소와 함께 살아온 경험이 있고, 발전 산업 일자리가 사라진 자리를 다시 채워준다는 점에서 지역 정서상으로도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한국 기업이 해외 SMR 수출을 추진할 때도, 폐쇄 예정이거나 이미 폐쇄된 화력발전 부지를 우선 검토 대상으로 삼을 만한 이유입니다.
둘째, 복수국 동시 인허가 전략입니다. Holtec이 미국과 영국에서 같은 설계로 동시에 인허가를 추진하는 방식은, 하나의 표준설계를 두고 여러 국가의 규제기관과 병행해서 협의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국가마다 별도의 설계를 제시하기보다, 표준화된 단일 노형으로 여러 시장에 동시 진입하는 편이 인허가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데 유리합니다.
셋째, 현지 파트너십을 통한 시장 진입입니다. Holtec은 미국 Palisades 사업에서는 현대건설과, 영국 Cottam 사업에서는 EDF Energy와 각각 합작법인을 구성했습니다. 원자로 기술을 보유한 벤더가 현지 건설·운영 역량을 갖춘 기업과 손잡는 구조는, 해외 수출 시 현지 인허가·시공·운영 리스크를 분산하는 데 효과적인 접근입니다.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역시 이런 현지 파트너십 모델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관건이 될 수 있습니다.
"Holtec은 영국 사업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며, 영국 내 원자력 기자재 제조공장 설립도 검토 중입니다." — Holtec 사장 Rick Springman
이 발언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원자로 수출이 단순히 발전소 한 기를 짓고 끝나는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현지 제조 기반 구축까지 이어지는 장기 전략으로 설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Cottam의 제안서는 2026년 하반기에 영국 정부의 검토 결과를 통보받을 예정입니다. 옛 석탄발전소의 굴뚝이 있던 자리에 원자로가 들어설지, 그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나오는지에 따라 다른 나라들의 SMR 부지 전략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결과를 지켜보는 일은, 한국의 SMR 수출 전략을 가다듬는 데도 적지 않은 단서를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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