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을 늘리려면, 먼저 쓰레기 버릴 곳부터 정해야 합니다

2026. 7. 1. 04:47원자력 뉴스

소형모듈원자로(SMR), 첨단원자로 같은 단어들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면서 "이제 원전이 정말 늘어나는구나" 하는 기대와 동시에, "그럼 그 폐기물은 다 어디로 가나요?"라는 질문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새 원자로를 어디에 짓고 어떻게 운전할지는 활발히 논의되는데, 정작 다 쓰고 난 부품과 폐기물을 어디에 묻을지는 상대적으로 조용히 다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나온 규제 변화 하나가, 이 질문이 SMR 확산의 숨은 전제조건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GTCC 폐기물이 대체 뭐길래 발목을 잡았을까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2026년 6월 29일, 저준위방사성폐기물(LLW, Low-Level Radioactive Waste)의 육상처분을 규율하는 10 CFR Part 61 규정의 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저준위방사성폐기물이란 사용후핵연료처럼 고준위는 아니지만, 일반 쓰레기처럼 아무 데나 버릴 수도 없는 중간 단계의 방사성폐기물을 말합니다. 작업복, 필터, 그리고 원자로 안에서 중성자를 맞아 방사화된 금속 부품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저준위방사성폐기물 안에는 등급이 나뉘어 있는데, 그중 가장 농도가 높은 등급을 넘어서는 폐기물을 GTCC(Greater-Than-Class-C, Class C 초과) 폐기물이라고 부릅니다. NRC 위원장 Ho Nieh는 6월 25일 브리핑에서 "현재 GTCC 폐기물 처리 경로가 전혀 없다"고 밝혔습니다. 즉, 가장 농도가 높은 등급의 저준위폐기물을 합법적으로 처분할 방법 자체가 미국에 아직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새 원자로를 짓고 운전하는 일은 가능해도, 거기서 나오는 GTCC 폐기물을 묻을 곳이 없다면 그 원자로는 결국 폐기물을 시설 안에 쌓아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개정안은 무엇을 새로 만든 것인가

이번 Part 61 개정 제안은 행정명령 14300 "NRC 개혁 명령" 이행을 위해 NRC가 추진 중인 규정 정비 작업의 하나로, 핵심은 위험정보 기반 프레임워크(risk-informed framework)를 새로 도입한 것입니다. 위험정보 기반이라는 말은 폐기물의 종류를 일률적으로 나누는 대신, 실제로 어떤 핵종이 얼마나 들어있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 위험한지를 기준으로 처분 방식을 정한다는 뜻입니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처분시설이 부지별 기술분석에 기반한 인수기준을 쓸지, 기존 분류체계에 기반한 일반기준을 쓸지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준수기간을 구체화해, 장수명 핵종(반감기가 긴, 즉 방사능이 천천히 줄어드는 핵종)을 다량 포함하지 않는 시설은 1,000년, 포함하는 시설은 10,000년의 준수기간을 적용하도록 했습니다. 1,000년이나 10,000년이라는 숫자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실 수 있는데, 이는 시설을 그 기간 동안 사람이 지켜본다는 뜻이 아니라, 처분시설을 설계할 때 그만큼 긴 시간 동안 누출이나 침식으로부터 안전성이 유지되도록 입증해야 한다는 기준입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변화로, GTCC 폐기물 처분 경로가 신설됩니다. 근표층 처분(지표면 가까운 깊이에 매설하는 방식)과 특수처분시설 모두에 적용 가능한 경로를 마련하되, 핵종 농도에 상한선을 두는 방식입니다. 아울러 GTCC 폐기물 처분에 대한 규제권한은 개별 주(Agreement State)에 위임하지 않고 NRC가 직접 보유하도록 명확히 했습니다. 농도가 가장 높은 폐기물인 만큼, 규제 일관성을 위해 연방 차원에서 직접 관리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 이것이 SMR 확산의 숨은 전제조건일까

SMR이나 첨단원자로가 주목받는 이유는 건설비를 낮추고 부지를 다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원자로가 늘어나면 그만큼 중성자조사 부품 같은 GTCC급 폐기물도 함께 늘어납니다. 처분 경로가 없는 상태에서 원자로 숫자만 늘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새 정수장은 계속 짓는데 정작 오수를 내보낼 하수관은 아직 설계도조차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당장 물은 공급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시설 운영 자체가 막히게 됩니다.

이번 개정안은 바로 그 하수관에 해당하는 규정 공백을 메우는 작업입니다. NRC 위원장이 언급했듯, 이는 핵종 농도별로 구조화된 위험정보 기반 프레임워크를 마련해 근표층 처분에 적합한 안전 체계를 제시하려는 시도입니다. 동시에 미국 에너지부(DOE)가 추진 중인 Nuclear Lifecycle Innovation Campuses 구상과도 맞물려 있어, 신규원전과 SMR 확대에 따라 누적될 핵연료주기 후단(폐기물 처분 단계) 규제 공백을 해소하려는 연방정부 차원의 조율된 움직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새 원자로를 빠르게 늘리려는 정책과, 그 결과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제도를 동시에 정비하는 것이 미국 원자력 정책의 현재 모습인 셈입니다.

이번 제안규칙은 향후 수일 내 연방관보에 게재되며, 게재 후 45일간 공중의견을 수렴합니다(Docket NRC-2011-0012). NRC는 별도 공청회도 개최할 예정이어서, 실제 규정 확정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단계입니다.

한국의 원전 확대 정책에 주는 시사점

한국 역시 i-SMR 개발과 신규원전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만큼, 이번 미국 사례는 단순히 남의 나라 규제 뉴스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내 사용후핵연료와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정책을 수립할 때, 미국이 채택한 위험정보 기반 등급체계와 준수기간 차등화 방식은 정책설계의 참고 사례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폐기물을 일률적인 기준이 아니라 실제 핵종 구성과 위험도에 따라 차등 관리하는 접근은, 처분시설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GTCC 처분 경로가 명확해지면, SMR이나 첨단원자로 개발사 입장에서는 인허가와 사업 추진의 불확실성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처분 경로가 없다는 이유로 사업 진행이 막히는 일을 미리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처분시설을 운영하는 기업들에게도 신규 라이선싱이나 시설 확장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어, 폐기물 처분 산업 자체가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를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원자로를 더 짓는다는 결정과, 그 원자로가 남기는 것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결정은 사실 하나의 결정입니다. 둘 중 하나만 앞서 나가면 결국 다른 하나가 전체 속도를 늦추게 됩니다. 이번 NRC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원전 확대 논의에서도 폐기물 처분 경로에 대한 질문이 건설 계획만큼이나 일찍, 그리고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