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8. 03:05ㆍ원자력 뉴스
"스타트업이 원자로를 만든다." 이 문장을 처음 들으면 어딘가 어색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국가가, 대형 기업이, 수십 년에 걸쳐 짓는 것이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상업용 원자로가 가동을 시작한 것은 2016년이었고, 그 이전 원자로는 1996년 완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는 수십 개의 원자력 스타트업이 동시에 원자로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수십 년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실리콘밸리식 속도로.
2026년 3월, 미국원자력학회(ANS)는 이 스타트업들을 한자리에 불러 현재 상황을 공개하는 웨비나를 열었습니다. 주제는 'Path to Criticality(임계로 가는 길)'였습니다.
임계란 무엇인가요? — 원자로의 첫 점화 순간
원자로가 처음으로 작동하는 순간을 임계(Criticality) 달성이라고 합니다. 핵분열 반응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스스로 지속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계속 넣어주지 않아도 원자로가 스스로 반응을 유지하는 상태, 그것이 임계입니다.
자동차로 치면 처음 시동이 걸리는 순간입니다. 이전까지 아무리 훌륭한 설계라도, 임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원자로는 그냥 비싼 금속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스타트업들은 임계 달성을 최초의 기술 검증, 즉 '우리 원자로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증거로 봅니다.
2026년 여름, 여러 스타트업들이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데드라인으로 임계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건물 36일, 원자로 4주 — Aalo Atomics의 속도
발표자 중 가장 인상적인 숫자를 들고 나온 팀은 Aalo Atomics였습니다.
설립한 지 2.5년. 처음 두 명이었던 팀이 약 150명 규모가 됐습니다. 35개 주, 6개국에 걸쳐 127개 공급업체와 협력 중입니다. 그리고 임계 시험 원자로의 건물은 36일 만에 지었고, 원자로 본체는 4주 만에 완성했습니다.
GE가 제조한 연료는 이미 현장에 도착해 있습니다. 최종 안전 승인이 나면 연료를 넣고 임계를 향해 출력을 올립니다. 프로젝트 착수부터 임계까지 목표는 7~8개월입니다.
Aalo의 전략은 단순합니다. 작은 임계 시험 원자로를 먼저 빠르게 만들어 물리 데이터를 확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10MW급 전출력 나트륨 냉각 원자로(2027년 1분기 목표)로 확장합니다. 그다음은 2028년까지 연간 100기를 찍어낼 수 있는 공장 건설, 2030년까지 원자로 100기(총 1GW) 배치입니다. 목표 시장은 AI 데이터센터입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 다른 스타트업들의 접근
같은 무대에 선 다른 팀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임계를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Antares는 히트 파이프 냉각 방식의 원자로를 개발 중입니다. 히트 파이프란 열을 전달하는 밀봉된 관으로, 냉각재 펌프 없이 열을 이동시킬 수 있어 구조가 단순합니다. 민간 자본 1억 4천만 달러 이상을 조달했고, 아이다호 국립연구소(INL) 시설에서 2026년 7월 4일 이전 첫 임계를 목표로 했습니다. 군 기지와 NASA에 공급하는 것이 초기 목표입니다.
Kairos Power는 '먼저 만들어라(Build-first)'는 문화로 유명합니다. 말과 설계 문서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실제 하드웨어를 반복 제작하면서 배우는 방식입니다. 용융불화염 냉각 방식의 시험 원자로 Hermes 1 건설이 진행 중이고, 실증 출력 원자로 Hermes 2는 2026년 4월 착공했습니다. NRC 건설 허가를 받는 데 Hermes 1은 21개월이 걸렸는데, Hermes 2는 14개월로 줄었습니다. 반복할수록 빨라진다는 것을 숫자로 보여준 셈입니다.
Radiant는 1MW급 고온 가스 냉각 원자로 Kaleidos를 개발 중입니다. 헬륨으로 냉각하고 TRISO 연료를 씁니다. TRISO는 세라믹 여러 층으로 싸인 구형 연료로, 극한 온도에서도 방사성 물질이 새어나오지 않는 설계입니다. 2026년 4월 INL 내 특수 시설에 입주해 1년간 시험을 시작했고, 2026년 여름 전출력 달성을 목표로 했습니다. 테네시에는 연 50기 생산 목표의 공장을 착공했습니다.
왜 지금인가요? — 이 경쟁을 가능하게 한 것들
원자력 스타트업이 갑자기 쏟아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변화는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민간 스타트업이 국립연구소 시설을 활용해 원자로를 시험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들었습니다. INL에 설립된 NRIC(국립 원자로 혁신 센터)는 12개 이상의 원자로 개발사와 함께 임계까지의 전 과정을 지원합니다.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의 NCERC는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70년 넘게 운영된 임계 실험 시설을 민간 스타트업에도 개방했습니다. Aalo, Kairos, Antares, TerraPower 등이 모두 이 시설을 이용합니다.
수요도 만들어졌습니다. AI 데이터센터는 안정적인 전력을 24시간 원합니다. 군은 외딴 기지에서도 자립할 수 있는 소형 전원이 필요합니다. 우주 임무는 태양광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작동하는 전원을 요구합니다. 과거에는 없던 명확한 수요처가 생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타트업 문화가 원자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만들고, 실패하고, 다시 만들어라." 이 방식을 원자력에 그대로 적용하는 팀들이 등장했습니다. Kairos의 '빠른 하드웨어 반복', Aalo의 '7개월 안에 임계', Antares의 '7월 4일 데드라인'은 모두 그 문화의 표현입니다.
수십 년간 원자력은 느리고 무거운 산업이었습니다. 대형 기업과 국가가 움직이고, 설계에 10년, 건설에 10년이 걸렸습니다. 지금 그 판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36일 만에 건물을 짓고, 4주 만에 원자로를 완성하는 팀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팀들이 모두 성공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자력에서 이런 속도 경쟁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입니다.
'원자력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50년 된 연구로가 처음으로 전기를 만들다. (0) | 2026.05.08 |
|---|---|
| 세계 최초 상업용 SMR이 중국에서 켜졌다 — 링롱원이 바꾸는 것들 (0) | 2026.05.08 |
| 방사선 속으로 들어가는 로봇들 — 원전에 자율 로봇이 필요한 진짜 이유 (0) | 2026.05.08 |
| 달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운다 — 2030년대 우주 원자력 경쟁의 실체 (0) | 2026.05.08 |
| 소형 원자로, 작다고 다 같은 게 아닙니다 — SMR vs 마이크로원자로 비교 (0) | 2026.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