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해체 기술개발 국제협력 - 조사흑연

2026. 5. 9. 00:59원자력 뉴스

1987년, 이탈리아에서는 국민투표로 원자력발전소 운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페인과 지중해를 나눠 쓰는 Latina 원전은 그렇게 멈췄습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원전은 조금씩, 그러나 착실하게 해체되고 있습니다.

2026년 5월, 이탈리아 국영 원전해체 기관 Sogin과 영국 원전해체 책임기관 NDA(Nuclear Decommissioning Authority)가 5년 협력 MOU(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흑연 감속 원자로 해체 기술을 함께 개발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 협력은 원전 해체가 얼마나 복잡한 과제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국제 협력이 그 복잡함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흑연 원자로란 무엇인가 — 60년 전의 선택

Latina 원전은 Magnox형 흑연·가스 냉각로입니다. 영국이 개발한 1세대 원자로 기술로, 물 대신 이산화탄소로 원자로를 냉각하고, 흑연으로 만들어진 블록으로 중성자 속도를 조절합니다. 출력은 210 MWe로 현재 원전 기준으로는 소형이지만, 1964년 운전을 시작했을 때는 최신 기술이었습니다.

영국은 이 Magnox 기술로 26기의 원자력발전소를 지었고, 이후 개선된 버전인 AGR(Advanced Gas-cooled Reactor)을 더 지었습니다. 이탈리아의 Latina는 영국 밖에서 지어진 몇 안 되는 Magnox 원자로 중 하나입니다.

흑연은 원자로 안에서 중성자를 느리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중성자가 느려야 우라늄 핵분열이 잘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흑연 블록이 원자로 노심 전체를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1기 원자로에 수백 톤에서 수천 톤의 흑연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흑연이 수십 년간 중성자를 맞으면서 변한다는 데 있습니다. 조사흑연(Irradiated Graphite)이라고 부르는데, 방사성 동위원소가 생성되고 물리적 성질도 바뀝니다.

조사흑연의 도전 — 그래서 어렵습니다

원전 해체 전문가들 사이에서 조사흑연은 까다로운 과제로 꼽힙니다. 이유가 여러 가지인데, 차근차근 짚어보겠습니다.

첫째로, 탄소-14(C-14)의 문제입니다. C-14는 방사성 동위원소로, 반감기가 약 5,730년입니다. 흑연 안에서 소량 생성되는데, 지하 처분장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지하수로 이동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처분 안전성 평가에서 중요한 변수입니다.

둘째로, 위치별 편차가 큽니다. 같은 원자로 안에서도 노심 중앙과 가장자리,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중성자 조사량이 다릅니다. 따라서 흑연 블록마다 방사성 핵종의 양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전체 흑연의 방사성 총량을 정확히 아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셋째로, 부피입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한 조사흑연 폐기물은 25만 톤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흑연 원자로를 운전했던 나라들이 이 흑연을 어떻게 처분할지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전 세계 전문가들이 협력해 해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영국 협력이 가능한 이유

Sogin과 NDA가 협력을 맺은 데는 두 기관이 서로에게 배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NDA는 Magnox 원자로 해체 분야에서 세계 최대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Berkeley, Bradwell, Dungeness A, Sizewell A 등 10여 곳의 1세대 원전 부지를 관리하며, 이미 많은 해체 경험을 축적했습니다. 앞으로는 AGR 원전들의 해체도 담당해야 합니다.

반면 이탈리아의 Latina는 영국 밖에 지어진 Magnox 원자로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동일한 설계를 다른 규제 환경, 다른 기후와 지질 조건 아래에서 해체하는 과정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기술이라도 나라가 다르면 어떤 차이가 생기는지 확인하는 것이 기술 발전에 중요합니다.

이번 협력의 핵심 주제는 대형 구성품 해체, 고급 절단 기술, 원격 해체 등입니다.

원자로 안의 증기발생기나 열교환기는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달하는 대형 금속 구조물입니다. 방사선 환경에서 이것을 잘라내고, 포장하고, 운반하는 작업은 일반 철거와 완전히 다릅니다. 로봇과 원격 조작 장비가 필요하고, 절단 과정에서 발생하는 먼지와 금속 파편이 방사성 오염을 확산시키지 않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Sogin은 최근 일본 원자력발전주식회사(JAPC)와도 유사한 협력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탈리아가 단순히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 기술 개발의 파트너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전 해체는 문제가 아니라 과제입니다

원전 해체가 어렵고 오래 걸린다는 사실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원전이 위험한 이유"로만 해석하는 것은 한쪽 면만 보는 것입니다.

해체가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이유는 그만큼 철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방사성 물질이 환경에 나오지 않도록 단계별로 확인하며 진행합니다. Latina 원전이 1987년에 멈췄지만 아직 해체 중인 것은, 해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로봇 기술, 원격 조작 기술, 방사선 측정 기술, 폐기물 특성 분석 기술이 모두 발전했습니다. 40년 전에는 없었던 도구들이 지금은 있습니다.

한국도 2022년 고리 1호기 해체를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영국의 협력처럼, 한국도 경수로 해체 분야에서 축적한 기술을 국제 무대에서 나눌 수 있는 위치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원전 해체는 원자력 기술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전문 기술 영역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