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8. 06:20ㆍ원자력 뉴스
2026년 5월 13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회 상원 의사당. 찰스 3세 국왕이 왕좌에 앉아 연설을 읽었습니다. 이것이 영국의 King's Speech, 즉 왕의 연설입니다. 매년 열리는 의회 개원식에서 국왕이 정부의 핵심 정책 과제를 공식 선언하는 영국의 전통입니다.
그 연설에 이런 문장이 담겼습니다. *"My Ministers will also take forward recommendations of the Nuclear Regulatory Review and encourage a new era of British nuclear energy generation."* (나의 장관들은 핵규제 검토 권고사항을 이행하고 영국 원자력 발전의 새 시대를 촉진할 것입니다.)
국왕이 의회 기록에 남기는 공식 선언으로, 영국이 원자력 새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Nuclear Regulation Bill(핵규제법안)의 배경입니다.
영국의 핵 규제를 바꾸는 Fingleton Review
이 법안의 근거가 되는 것은 Fingleton Review(핑글턴 검토)입니다. 2025년 11월 발표된 이 보고서는 영국의 핵 규제 체계가 21세기 원자력 산업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핵심 권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새로운 핵규제위원회 신설. 현재 영국 원자력청(ONR)이 담당하는 기능을 재편합니다. 둘째, 안전 리스크 프레임워크 현대화. 수십 년 된 안전 기준을 현대 원자로 기술에 맞게 업데이트합니다. 셋째, 규제 효율화를 통한 인허가 기간 단축.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규제의 목표 자체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기존 규제의 공식 목표는 "안전 확보"였습니다. 새 법안은 여기에 "산업 활성화 지원"을 추가합니다. 안전을 지키면서 동시에 산업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규제기관의 공식 역할로 명문화하는 것입니다.
안전에서 활성화로 — 이게 왜 중요한가
원자력 규제가 "안전만"을 목표로 할 때와 "안전 + 활성화"를 목표로 할 때의 차이는 실질적입니다.
원자력 인허가 심사를 생각해봅시다. 규제기관이 "혹시라도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더 많은 자료를 요청하자"는 입장에서 심사하는 것과, "이 원자로는 안전하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승인해줄 수 있을까"를 함께 생각하는 것은 결과가 다릅니다.
미국의 ADVANCE Act(2024)가 정확히 이런 전환을 의도했습니다. NRC(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임무 설명서에 "산업 활성화"를 추가하는 것이 핵심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의 Nuclear Regulation Bill은 미국이 걷기 시작한 같은 길을 걷겠다는 선언입니다.
두 나라가 거의 동시에 이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서방 원자력 규제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영국이 원전을 다시 키우려는 이유
영국은 현재 에너지 위기와 기후 목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노동당 정부의 목표는 2030년 청정 전력 95%입니다. 태양광과 풍력이 핵심이지만, 간헐적으로 발전하는 재생에너지만으로 안정적 전력 공급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동시에 기존 원전은 노후화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원전 대부분은 1세대 Magnox나 2세대 AGR(가스냉각로) 방식으로, 많은 기들이 이미 폐쇄됐거나 폐쇄 임박 상태입니다. 지금 짓지 않으면 원자력 비중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두 가지 프로젝트가 이 법안의 핵심 수혜자입니다. EDF의 Sizewell C(3.2GW)는 영국-프랑스 합작으로 추진 중인 대형 원전입니다. 그리고 Rolls-Royce SMR(470MWe)은 영국이 독자 개발 중인 소형모듈원자로입니다.
Rolls-Royce SMR은 특히 상징적입니다. 항공기 엔진의 Rolls-Royce가 원자로를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지만, 영국 제조업 부활과 에너지 독립을 동시에 상징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Nuclear Regulation Bill이 통과되면 Rolls-Royce SMR의 인허가 일정이 실질적으로 빨라질 수 있습니다.
야당도 찬성하는 초당적 지지
에너지 정책은 보통 정치적 전선이 갈리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법안은 다릅니다. 노동당 정부가 추진하는 이 법안에 보수당도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에너지 독립과 기후목표라는 과제 앞에서 원전이 초당적 선택이 된 것입니다.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키어 스타머 총리가 내부 압박 속에서도 원자 르네상스를 핵심 정책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 문제가 영국 정치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 과제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의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이 사례를 어떻게 볼지 흥미롭습니다. 규제기관의 역할이 "막는 것"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공식 전환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답은 앞으로 몇 년 안에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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