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8. 06:24ㆍ원자력 뉴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87년, 이탈리아 국민들은 투표소에 섰습니다.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원자력발전을 계속하시겠습니까?"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원전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마지막 원전의 불이 꺼졌습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2026년 5월 14일, 이탈리아 멜로니 총리가 상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 여름, 원자력 복귀를 위한 입법 프레임워크를 출범시킬 것입니다."
한 번의 국민투표가 한 나라의 에너지 정책을 40년 동안 묶어두었다가, 이제 풀리고 있습니다.
왜 이탈리아는 원전을 포기했나 — 체르노빌이 바꾼 것
체르노빌 사고 이전에도 이탈리아의 원자력에 대한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체르노빌의 방사성 구름이 유럽 전역을 덮었고, 이탈리아 북부의 농산물에서도 방사성 오염이 검출됐습니다. 공포는 실체가 되었습니다.
1987년 국민투표는 세 가지 항목을 물었습니다. 원전 건설·운영 참여 금지, 해외 원전 투자 금지, 원전 부지 선정에 대한 정부 권한 폐지. 세 항목 모두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습니다. 이탈리아 민주주의가 직접 에너지 정책을 결정한 순간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당시 4기의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발전소들은 순차적으로 문을 닫았고, 1990년 라티나 원전이 마지막으로 운전을 멈췄습니다. 이탈리아는 유럽 주요 경제국 중 원전이 없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됐습니다.
40년 후 무엇이 달라졌나 — 전기 요금과 에너지 안보
2024년 기준 이탈리아의 산업용 전기 요금은 유럽 최고 수준입니다. 독일보다도 비싸고, 프랑스의 두 배에 가깝습니다. 프랑스가 원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수출하는 동안, 이탈리아는 그 전기를 비싸게 수입했습니다.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국경을 넘어 수입하는 전기의 상당 부분이 프랑스 원전에서 만들어진 전기입니다. 원전을 없앴지만, 원전 전기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더 비싼 값을 치르면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 에너지 시장을 뒤흔들었습니다.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했고, 이탈리아처럼 가스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에너지 안보가 국가 안보와 동의어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멜로니 총리가 원전 복귀의 근거로 제시한 세 가지는 명확합니다. 에너지 안보, 전기 요금 절감, 탈탄소화입니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는 선택지가 원자력 외에 마땅히 없다는 판단입니다.
이탈리아가 선택하는 것 — SMR, 민간 운영
멜로니 총리의 선언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단서가 있었습니다. "최신 세대 SMR을 민간 운영 방식으로 도입할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대형 원전이 아닌 SMR(소형모듈원자로)을 선택한 이유는 실용적입니다. 이탈리아는 40년간 원자력 산업 기반이 없었습니다. 대형 원전을 새로 짓기 위한 규제 기관도, 숙련 인력도, 공급망도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십조 원짜리 대형 원전 건설을 시작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반면 SMR은 표준화된 설계를 공장에서 제작해 현장에 조립하는 방식으로, 더 빠르고 낮은 초기 투자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는 어떤 SMR을 도입할지 내부 검토 중이며, 캐나다·프랑스·한국·미국의 SMR 기술을 후보군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 기업들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Eni·Leonardo·Ansaldo Energia 3사가 컨소시엄 'Nuclitalia'를 구성해 차세대 원자력 기술 검토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인프라를 갖춰가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탈리아 국가 에너지 연구기관 ENEA는 지난 15년간 차세대 핵분열 연구를 이어왔고, 롬바르디아 주는 세계 지방정부 최초로 IAEA와 MOU를 체결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의 무게 — 규제기관부터 세워야 한다
그러나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탈리아가 SMR을 도입하려면, 핵안전을 감독할 독립 핵안전청(Nuclear Safety Authority)을 새로 설립해야 합니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원자력발전소 허가와 감시를 담당하는 독립 규제기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40년간 원전이 없었으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규제기관 설립, 인허가 프레임워크 구축, 인력 양성까지 걸리는 시간을 전문가들은 5~7년으로 예상합니다. SMR이 실제로 전력을 공급하기까지는 그 이후의 시간이 또 필요합니다. 멜로니 총리의 선언이 야심차지만, 실제 전력 생산까지의 경로는 길고 험합니다.
반대도 만만치 않습니다. 환경단체와 녹색당은 핵폐기물 처리와 안전 문제를 들며 복귀에 반대합니다. 1987년 국민투표의 정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합니다.
이탈리아의 이야기는 에너지 정책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한 번의 집단적 결정이 수십 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현실이 변하면, 그 결정을 되돌리는 데도 또 다른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독일, 스페인, 그리고 한국이 자국의 탈핵 논쟁을 바라볼 때, 이탈리아의 40년이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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