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1. 22:51ㆍ원자력 뉴스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아 들고 "왜 아직 짓지도 않은 원전 비용이 여기 포함돼 있지?"라고 의아해하신다면, 그 의문은 지극히 정당합니다. 영국에서는 지금 바로 그 일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2026년 5월, 영국 국가감사원(NAO)이 Sizewell C 원전 프로젝트의 금융 구조에 대해 공개 경고를 발표하면서, 이 새로운 방식이 과연 누구를 위한 혁신인지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RAB 모델이란 무엇인가 — 소비자가 '공동 투자자'가 되는 구조
RAB는 Regulated Asset Base, 즉 규제자산기반의 줄임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원전이 완공되어 전기를 팔기 시작하기 전에도 소비자가 매달 내는 전기요금에 건설 비용 일부가 포함되는 방식입니다.
기존의 CfD(Contracts for Difference, 차액정산계약)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CfD에서는 원전이 완공되어 전기를 생산한 뒤에야 약속된 가격을 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건설 기간 중 발생하는 비용과 위험은 전적으로 개발사가 떠안습니다. 반면 RAB 모델에서는 건설 기간 중에도 투자자에게 수익이 지급되고, 그 재원이 소비자 요금에서 나옵니다.
영국 정부가 이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Hinkley Point C(HPC, 현재 건설 중인 영국의 신규 원전)에서 EDF가 모든 건설 리스크를 홀로 부담하는 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공사 지연과 비용 초과가 반복되면서 개발사의 재무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이는 더 높은 최종 전기 단가로 이어졌습니다.
국가감사원이 경고를 발령한 이유 — £40억의 선납 부담
2026년 5월 20일 NAO가 발표한 보고서의 핵심은 두 숫자입니다. 최대 £40억(약 7조 원)의 소비자 초기 부담, 그리고 최대 £180억(약 32조 원)의 장기 절감 효과입니다.
NAO는 "RAB 모델의 혁신성을 인정하지만, 이 모델에 내재된 위험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특히 투자자에게 지급되는 수익이 결국 소비자 요금에서 충당된다는 점, 그리고 건설이 지연되거나 비용이 초과될 경우 그 부담이 얼마나 더 커질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를 분명히 했습니다.
Sizewell C의 규모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총 건설비 약 £380억(약 67조 원), 출력 3.2GW, EPR(유럽형 가압수로, 프랑스 EDF가 설계한 3세대+ 원자로) 2기로 구성됩니다. 완공 이후에는 60년 이상 약 600만 가구에 전기를 공급하게 됩니다. 2025년 11월 재정 클로징(금융 조달 확정)이 완료됐으며, 주주 구성은 영국 정부 44.9%, 캐나다 연금펀드(La Caisse) 20%, Centrica 15%, EDF 12.5%, Amber Infrastructure 7.6%이고, 13개 은행이 £50억의 채무 조달에 참여했습니다.
문제는 "장기적으로는 싸다"는 논리가 얼마나 현실에서 작동하느냐입니다. 영국에서 원전 건설이 예산과 일정을 지킨 사례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 장기 편익 추산을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듭니다.
'비용 분담'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닌 이유 — 리스크의 재배분 문제
이 모델을 단순히 "소비자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것"으로 보면 절반만 맞습니다.
원전 건설의 가장 큰 문제는 초기 자본 조달입니다. 단일 프로젝트에 수십조 원의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완공까지 10~15년이 걸리고 중간에 한 푼도 회수하지 못한다면, 민간 투자자를 설득하기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그 결과, 원전은 정부 보증 없이는 사실상 지어지지 못하는 구조가 됩니다.
RAB 모델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려는 시도입니다. 건설 기간 중에도 수익 흐름을 확보함으로써 민간 투자를 유치하고, 그 결과 정부의 직접 재정 부담을 줄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실제로 Sizewell C에는 영국 정부(44.9%) 외에 연금 펀드, 민간 에너지 기업, 다수의 금융 기관이 참여했습니다. 이는 순수 정부 재정으로 짓는 것보다 리스크가 분산된 구조입니다.
또한 Sizewell C의 설계는 HPC 대비 건설비를 22% 절감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앞서 지어진 원전의 경험과 설계 개선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이는 소비자가 부담하는 장기 단가를 낮추는 데 중요한 변수입니다.
그럼에도 핵심 질문은 남습니다. "장기 편익이 실현되려면 건설이 계획대로 되어야 하는데, 그 전제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 이것이 NAO가 모니터링을 촉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과 다른 나라들은 이 모델을 따라야 할까?
영국의 RAB 모델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영국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전 신규 건설을 추진하거나 검토하는 모든 나라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누가 건설 기간 중의 리스크를 부담할 것인가?"
전통적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정부가 직접 재원을 투입하고 국가 채무로 처리하는 방식. 둘째, 민간 기업이 CfD처럼 완공 후 수익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전액 투자하는 방식. 영국은 두 방식 모두에서 문제를 경험한 뒤, 제3의 길을 찾은 것이 RAB 모델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에게 이 모델이 그대로 이식 가능한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국에는 전력 규제 체계, 소비자 보호 장치, 투명한 감사 기관(NAO처럼 독립적으로 경고를 발령할 수 있는 구조)이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기반 없이 RAB 구조만 도입한다면, 소비자 보호 없는 비용 전가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Sizewell C가 성공적으로 완공되어 장기 편익 £180억이 실현된다면, 이 모델은 원전 금융 구조의 새로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건설이 지연되고 비용이 초과된다면, "소비자가 왜 실패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더 날카로운 질문이 돌아올 것입니다.
영국 국가감사원의 경고는 그 가능성을 미리 인식하고 대비하라는 신호입니다. 원전이 국가 에너지 전략의 핵심이 되려면, 기술적 안전성만큼이나 금융 구조의 투명성과 소비자와의 신뢰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Sizewell C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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