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START 붕괴 후의 세계 — 러시아 핵훈련이 드러내는 핵억제 체제의 균열

2026. 5. 21. 22:46원자력 뉴스

핵전쟁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고 두렵게 느껴집니다. 냉전이 끝난 뒤 수십 년 동안 세계는 조약과 협상이라는 '규칙'을 통해 그 공포를 조금씩 관리해 왔습니다. 그런데 2026년 2월, 그 규칙을 지탱하던 마지막 기둥이 무너졌습니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마지막 핵군비통제 조약인 New START가 공식 종료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불과 석 달이 지난 2026년 5월 19~21일, 러시아는 64,000명 이상의 병력이 참여하는 대규모 핵전력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이제 세계는 핵전쟁을 어떻게 막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이 결코 과장이 아닌 시대가 된 것입니다.


New START란 무엇이었나 — 그리고 왜 사라졌는가

New START(New 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 신전략무기감축조약)는 2010년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협정으로, 양국이 실전 배치할 수 있는 전략 핵탄두 수를 각각 1,550개로 제한하고, 핵무기 운반 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전략폭격기의 수도 규제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조약이 단순한 숫자 제한이 아니라 상호 검증 체계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양국 사찰단이 상대국 핵 시설을 직접 방문해 실제 상태를 확인하고, 정해진 주기로 핵전력 현황을 통보하는 투명성 채널이 작동했습니다.

이 조약은 2026년 2월 공식 만료됐습니다. 러시아가 2023년 참여를 일시 정지한 데 이어 미국과의 연장 협상이 사실상 결렬된 결과입니다. 이제 양국 사이에 핵전력 규모를 제한하거나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공식 채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냉전 이후 40여 년간 유지돼 온 미-러 핵군비통제 체제가 조약 공백 상태로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러시아 핵훈련의 규모와 맥락 — 숫자가 말하는 것

2026년 5월 19~21일, 러시아 국방부는 3일간의 대규모 훈련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공개된 수치는 이렇습니다. 병력 64,000명 이상, 미사일 발사기 200기 이상, 항공기 140기, 수상함 73척, 핵잠수함을 포함한 잠수함 13척. 훈련에는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의 실사격도 포함됐습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벨라루스 영토에 배치된 오레슈니크 핵 탑재 미사일 시스템이 이번 훈련에 연동됐다는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동맹국 벨라루스와 공동으로 핵무기 운용 연습을 실시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훈련이 발표된 시점도 의미심장합니다. 푸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러시아 측은 훈련의 명분으로 '침략 위협 상황에서의 핵전력 준비 및 사용 연습'을 명시했습니다. 전쟁연구소(ISW, 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는 이 훈련을 "러시아가 2026년 봄-여름 공세에서 실질적 전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NATO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자국의 약점을 은폐하기 위한 전략적 서사 강화"라고 분석했습니다. 즉, 전장에서의 군사적 우위 대신 핵 위협이라는 신호를 통해 서방의 행동을 제약하려는 계산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New START 이후의 세계 — 핵억제는 지금 어떻게 작동하는가

핵억제(Nuclear Deterrence)란 "핵을 먼저 쓰면 상대방의 보복 핵공격으로 자국도 파멸한다"는 공포의 균형을 통해 핵전쟁을 방지하는 개념입니다. 냉전 당시에는 이 균형이 군비통제 조약이라는 외부 구조에 의해 지지되었습니다. 조약은 서로 핵전력의 규모를 알고, 확인하고, 예측 가능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공포만이 아니라 정보와 투명성이 억제를 뒷받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New START가 종료된 지금, 그 투명성 채널이 사라졌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2025년 러시아 핵전력의 약 95%가 현대화됐다고 밝혔지만, 이 주장을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단이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핵전력 현황에 대한 상호 통보도, 현장 사찰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NATO의 반응은 이 긴장감을 잘 보여줍니다. NATO 사무총장 마크 루터는 스웨덴에서 개최된 NATO 외무장관 회의 직전 브뤼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훈련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만 짧게 밝혔습니다. 공개적 논평을 최대한 자제한 것입니다. 러시아 외무차관 랴브코프는 이 상황을 틈타 "NATO의 핵 역량 강화는 러시아 군사 계획에 반드시 반영될 것"이라며, 프랑스의 전진 핵억제 전략(Forward Nuclear Deterrence Strategy) — 유럽 동맹국들의 핵 방어를 프랑스 핵우산 아래 통합하자는 구상 — 을 직접 겨냥했습니다.

핵억제 체제는 지금 두 가지 의미에서 균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규칙의 공백 — 양측 핵전력을 제한하고 확인하는 법적 틀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호의 과잉 — 조약이라는 안정적 구조 대신 군사 훈련, 외교 발언, 핵전력 현대화 선언이 억제의 신호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신호들은 조약보다 훨씬 오독되기 쉽습니다.


핵비확산 체제의 구조적 공백, 앞으로 어디로 가는가

New START 붕괴 이후 첫 대규모 핵훈련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글로벌 핵비확산 체제(NPT 체제)의 구조적 공백을 가시화하는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NPT(핵비확산조약)는 핵무기 비보유국이 핵무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핵보유국이 군비를 축소하겠다는 약속 위에 설계된 체제입니다. 그런데 양대 핵보유국인 미-러가 군비통제 조약 없이 서로 핵전력을 증강하는 모습은, NPT가 전제로 삼은 그 약속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도 분명합니다. 한반도 주변 강국 모두가 핵전력을 보유하거나 고도화하고 있는 시대에, 핵억제 체제가 흔들린다는 것은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New START 이후의 세계가 새로운 협상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아니면 1960년대 이전의 규칙 없는 핵 경쟁으로 되돌아갈 것인지 — 그 기로에 세계가 서 있습니다.

이 글을 읽기 전과 후, '핵억제'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규칙 없이 공포만으로 유지되는 평화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이번 훈련은 조용히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