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을 '레고처럼' 짓는다? 오크리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설 혁신

2026. 6. 13. 22:05원자력 뉴스

원전 건설 이야기를 들으면 "한 번 짓는 데 십 년 넘게 걸린다"는 이미지가 떠오르실 겁니다. 실제로 많은 대형 원전 프로젝트가 일정 지연과 비용 초과를 겪어왔습니다. 그런데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서는, 원전을 짓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핵심은 "한 번에 완벽하게 짓는다"는 전통적 사고를 버리고, 단계적으로 검증하며 짓는다는 접근입니다.

 

Hermes와 Hermes 2, 두 개의 실증로

Kairos Power는 오크리지의 동테네시기술공원 안에 두 가지 원자로를 함께 짓고 있습니다. 하나는 35MWt(메가와트 열출력) 규모의 비전력 실증로 Hermes, 다른 하나는 50MWe(메가와트 전력출력) 규모의 전력 생산형 Hermes 2(각 35MWt 2기)입니다. 둘 다 불화염냉각고온로(FHR)라는 4세대 원자로 방식인데, 물이 아닌 용융 불화염을 냉각재로 사용합니다.

Hermes 1은 미국에서 50년 만에 처음으로 건설 허가를 받은 비경수로형 원자로로, 2023년 허가를 받아 2025년 5월 핵심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Hermes 2는 2024년 11월 NRC로부터 건설 허가를 받은, 미국 최초의 전력 생산형 4세대 원자로입니다.

 

'한 번에 완벽하게'가 아니라 '반복하며 검증'

Kairos가 택한 방법은 반복 개발 접근(Iterative Development Approach)입니다. 공학시험장치(Engineering Test Unit, ETU)라는 시제품을 1번, 2번, 3번 순서로 만들어가며 기술을 단계적으로 검증하는 방식입니다.

ETU 1에서는 14톤의 용융 불화염 냉각재를 비핵 프로토타입에 옮기는 작업을 검증했습니다. ETU 2에서는 ASME(미국기계학회) 인증을 받은 반응로 용기를 30개 이상의 작은 모듈로 나누어 제작하고 조립하는 방식을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ETU 3는 오크리지 현장에서 유지보수, 운전원 훈련, 제조, 건설을 한꺼번에 통합해 검증하는 단계입니다. 2026년 4월 기공식에서 Kairos의 최고기술책임자 Edward Blandford는 "현재의 엄청난 에너지 수요에 규율과 긴박감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방식을 자동차 산업에 비유하면, 시제품을 한 대씩 만들어 도로에서 시험하며 문제를 찾고 다음 시제품에 반영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한 번에 완성차를 대량 생산하는 대신, 작은 단위로 반복하며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입니다.

 

전자빔으로 용접한다는 것

이번 ETU 3에서 새롭게 도입된 기술이 전자빔 용접(Electron Beam Welding)입니다. 영국의 Cambridge Vacuum Engineering, 셰필드대학 첨단제조연구센터와 협력해 반응로 용기 제작에 적용했습니다.

일반적인 용접은 아크(전기 불꽃)로 금속을 녹이고, 이때 빈 틈을 채우기 위한 충전 금속(filler metal)을 추가로 사용합니다. 전자빔 용접은 진공 챔버 안에서 전자빔이 가진 운동에너지를 열로 바꿔 금속을 직접 녹여 붙이는 방식입니다. 충전 금속이 필요 없어 비용이 줄고, 용접 부위 주변이 열로 변형되는 범위(열영향구역, HAZ)도 줄어듭니다. 쉽게 말해, 접착제를 더 적게 쓰면서도 더 깔끔하게 이어 붙이는 방법을 찾은 셈입니다.

여기에 더해 Kairos는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 현장에서 조립하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모듈과 지진 격리 기초, 그리고 앨버커키의 제조 캠퍼스에서 부품을 만들어 현장 조립하는 방식을 함께 적용하고 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만드는 대신, 공장에서 표준화된 부품을 만들어 현장에서는 조립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건설 기간과 비용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미 정해진 전력의 행선지

Hermes 2가 생산할 전력의 행선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Google과 TVA(테네시밸리청)가 체결한 전력구매계약에 따라, 50MWe의 청정 전력은 TVA 전력망을 통해 테네시·앨라배마의 데이터센터로 공급될 예정입니다. Kairos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2035년까지 500MW 규모의 상업 배치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사용 연료는 오크리지에서 개발된 TRISO 코팅 우라늄 분말 연료입니다.

 

한국 원전 산업이 눈여겨볼 부분

전자빔 용접이나 모듈 공장 제작 같은 기술은, 원자력만의 기술이 아니라 제조업 전반에서 발전해온 기술입니다. 이런 첨단 제조 기술을 보수적인 원자력 분야에 적용해 실제 건설 비용과 기간을 줄일 수 있는지를 실증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입니다. 한국의 원전 제조 기업들에게도, 이런 사례는 건설 비용 절감의 구체적인 경로를 보여주는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지켜볼 일정은 분명합니다. Hermes 1의 핵심 건설 완료와 운전 허가 신청이 2026년 후반으로 예정되어 있고, ETU 2의 가동 결과 발표, 그리고 Hermes 2의 첫 콘크리트 타설 일정이 차례로 나올 예정입니다. 오크리지의 작은 실험들이 쌓여, 원전을 짓는 속도와 비용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 지켜볼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