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EA가 그리는 원전 규제의 미래: NHSI·GFARR·ATLAS

2026. 6. 29. 08:50원자력 뉴스

새로운 원자로 기술이 잇달아 등장하는 지금, 현실적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나라마다 규제가 다르면 실제로 쓸 수 있을까?" 소형모듈원자로(SMR)나 4세대 원자로 같은 선진 원자로들은 상용화 직전까지 왔지만, 인허가(규제 승인) 절차가 나라마다 달라 사실상 국가 수만큼의 심사를 반복해야 하는 현실에 막혀 있습니다. 이 벽을 허물기 위해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주도하는 국제 규제 조화 이니셔티브들이 지금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습니다.


국가마다 다른 규제, 왜 문제가 될까요?

원자력 규제는 각국 정부가 자국민 보호를 위해 독립적으로 운영합니다. 이 원칙 자체는 옳습니다. 문제는 선진 원자로 개발사가 여러 나라에서 인허가를 받으려 할 때 생깁니다. A국에서 이미 수천 페이지 분량의 안전 심사를 마쳤어도, B국 규제기관은 처음부터 다시 심사합니다. 동일한 설계를 두고 나라마다 중복 심사가 반복되면,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개발사 입장에서는 "이 설계로 과연 글로벌 시장에 나갈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고, 투자자도 이탈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행정 효율의 문제가 아닌 이유가 있습니다. 선진 원자로의 상용화가 늦어진다는 것은 저탄소 에너지 전환에 쓸 수 있는 선택지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규제 체계가 기술 확산의 병목이 되는 셈입니다.


NHSI: 규제 조화를 향한 첫 번째 구체적 시도

IAEA는 2022년 NHSI(Nuclear Harmonization and Standardization Initiative, 원자력 조화·표준화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켰습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조화(Harmonization)'는 각국 규제 요건을 서로 가깝게 맞추는 것이고, '표준화(Standardization)'는 산업계의 설계 기준을 통일하는 것입니다. NHSI는 이 두 방향을 규제 트랙과 산업 트랙으로 나눠 동시에 진행합니다.

1단계(2022~ 2024)에서 약 25~30개 규제기관이 공동으로 참여해 세 가지 핵심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정보공유 장벽 해소 방안입니다. 규제기관들이 서로 기술 정보를 나누려 해도 영업비밀이나 수출통제 규정이 걸림돌이 됩니다. 이 문서는 그 장벽을 제도적으로 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둘째, 다국적 공동심사 절차입니다. 여러 나라 규제기관이 하나의 특정 노형(원자로 설계 유형)을 함께 심사하는 방식입니다. 같은 설계를 각자 따로 보는 대신, 한 자리에 모여 함께 검토하면 중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셋째, 심사결과 활용(Leveraging) 방법론입니다. 타국 규제기관이 이미 완료한 심사 결과를 "전부 믿겠다" 또는 "전부 무시하겠다"가 아니라, 주제별로 골라 활용할 수 있는 체계입니다. 자국 규제기관이 자신 있게 판단할 수 있는 분야는 독자 심사를 유지하되, 다른 나라가 이미 깊이 검토한 분야는 그 결과를 참고해 효율을 높이는 방식입니다.


GFARR와 ATLAS: 다음 단계에서 무엇이 달라지나요?

NHSI 2단계에서는 다섯 가지 과제가 동시에 추진됩니다. 이 중 핵심은 시범사업과 GFARR 두 가지입니다.

시범사업 EAGLES-300은 납냉각로(납을 냉각재로 쓰는 4세대 원자로)를 대상으로 벨기에와 루마니아가 공동 심사를 진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탈리아가 옵서버로 참여하며, IAEA는 일정·의제·회의 운영 등 프로젝트 관리자(PM) 역할을 맡습니다. 2025년 9월에는 비밀유지협약(NDA)과 정보공유 협정이 공식 체결되었습니다. 실제로 두 나라 규제기관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같은 설계를 함께 보는, 전례 없는 시도입니다.

GFARR(Global Framework for Advanced Reactor Reviews, 선진 원자로 국제심사체계)는 2028년 완성을 목표로 하는 최상위 국제 심사 체계입니다. 단순히 "어떻게 같이 심사할 것인가"를 정하는 수준을 넘어, 노심설계·안전설비 같은 핵심 기술 항목에 대한 공통 심사 기준 자체를 제시합니다. 규제기관 입장에서는 한정된 전문 인력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전 세계 전문가들의 집단 지식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개발사 입장에서는 GFARR 기준에 맞춰 설계하면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인허가를 추진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뒤늦게 설계를 바꾸는 데 드는 비용이 줄어듭니다.

ATLAS(Atomic Technologies Licensed for Applications at Sea)는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합니다. 대형 화물선 같은 민간 선박의 원자력 추진이나 해상 부유식 원전을 위한 국제 규제 체계를 만드는 이니셔티브입니다. 선박 안전을 담당하는 국제해사기구(IMO)와 협력하여 현재 운영 기준(Terms of Reference)을 수립 중이며, 2026년 말 미국 항만에서 공식 출범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추진 선박이 세계 각국 항구에 기항하려면 단일 국가 규제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ATLAS는 처음부터 국제 공조를 전제로 설계되고 있습니다.


규제 조화가 실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네덜란드 원자력 규제기관(ANVS)의 Marco Brugmans는 국제 규제 정합성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세 가지가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각국이 IAEA 안전기준에 기반한 성과기반(Performance-Based) 규제 체계를 갖추는 것입니다. 규칙 하나하나를 명문화하는 대신, "어떤 안전 성능 수준을 달성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규제가 설계될 때 국제 조화가 가능합니다.

둘째, 타국 심사 결과를 주제별로 선택해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전부 믿거나 전부 무시하는" 이분법을 버리고, 분야별로 정합성을 판단하는 실무 역량이 각 규제기관에 필요합니다.

셋째, 비밀유지협약(NDA)을 전제로 한 조기 기술 정보 공개입니다. 수출통제와 지식재산권이라는 장벽은 심사 초기 단계에 해소되어야 합니다. 뒤늦게 정보를 공유하려 하면 심사 전체가 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모두 개별 국가의 규제 역량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IAEA가 아무리 훌륭한 국제 체계를 만들어도, 각국 규제기관이 이를 실제로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문서로만 남게 됩니다.


원자력 기술의 미래는 기술 개발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규제 체계가 그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