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기관이 바뀌지 않으면 원자력 르네상스는 없다 — 영국 ONR의 선택

2026. 6. 29. 08:55원자력 뉴스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대부분의 시선은 새로운 원자로 설계나 정부의 지원 정책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변화의 병목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의외의 답이 나옵니다. 바로 규제기관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규제기관의 사고방식과 조직문화입니다.

2026년 3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주최한 규제정보회의(RIC 2026)에서 영국 원자력규제기관 ONR(Office for Nuclear Regulation)의 Mike Finnerty는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영국이 약 40년 만에 맞이하는 원자력 르네상스 국면에서, ONR 스스로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솔직하게 공개한 발표였습니다.


40년 만의 변화, 규제기관은 준비됐는가

영국은 현재 선진 원자로(Advanced Reactor) 신규 건설은 물론, 국방 원자력 프로그램 확대, 노후 원전 해체(Decommissioning) 등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전례 없는 규모의 변화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ONR이 내린 진단은 명확했습니다. 절차나 제도를 손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규제기관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ONR이 제시한 전략은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현대화(Modernizing)입니다. AI를 활용한 안전성 입증체계, 새로운 계측·제어 시스템 같은 신기술을 심사할 수 있는 외부 전문역량을 확보하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디지털 기술을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직문화를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촉진적 규제(Enabling Regulation)'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규제기관이 안전을 지키면서도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닌, 실질적인 진전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민첩성(Agility)입니다. 어떤 프로젝트가 언제 승인 신청을 낼지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규제기관이 경직된 구조로는 대응할 수 없습니다. ONR은 인력과 자원을 유연하게 배치하고, 다양한 종류의 규제 포트폴리오를 탄력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조직 역량을 갖추겠다고 밝혔습니다.

세 번째는 생산성(Productivity)입니다. 안전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심사 속도를 높이기 위해, '목적 중심적 심사(Fit-for-Purpose)' 방식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충분한 수준(Good Enough)"을 명확히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두껍고 복잡한 안전 서류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골드 플레이팅'이라는 고질병

영국 정부가 구성한 규제개혁 태스크포스의 권고사항은 이 문제를 더 날카롭게 짚었습니다. 규제 비효율의 원인이 단순히 규제기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산업계·규제기관이 함께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라는 진단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개념이 '골드 플레이팅(Gold Plating)'입니다. 안전성 입증체계(Safety Case)가 필요 이상으로 방대하고 복잡하게 작성되는 관행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원자력 분야에서는 규제 요건을 충족하는 것을 넘어, 그 이상으로 과도하게 입증 자료를 쌓는 문화가 오랫동안 자리 잡아 왔습니다. 처음에는 신중함에서 비롯된 관행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심사 기간을 늘리고 비용을 키우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태스크포스는 이를 시정하고, 예견 가능한 사고 시나리오와 중대한 결과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안전 문서 작성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담으려 하는 서류가 아니라, 실제로 중요한 것을 명확하게 다루는 서류가 더 안전하다는 역설적인 교훈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권고는 복수 규제기관 간 중복 심사 문제입니다. 원자력 시설 하나를 짓기 위해서는 원자력 안전, 환경, 계획(도시·토지 이용) 등 여러 규제기관의 심사를 각각 통과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비슷한 내용을 중복으로 검토하는 비효율이 발생합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통합 규제위원회(Regulatory Commission) 설립이 권고됐으며, 2027년 말을 목표로 추진 중입니다.


마인드셋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도 바뀌지 않는다

이번 발표에서 Finnerty가 가장 강조한 메시지는 절차 개선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원자력 르네상스를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가려면 사고방식(Mindset)과 조직문화(Culture)의 전환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규제기관이 새로운 기술과 사업자의 접근 방식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 안전 심사를 '통과시켜 주는 것'이 아닌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느냐의 차이가 결국 프로젝트 일정과 비용 전체를 좌우합니다.

ONR은 도전적인 일정 속에서도 이 변화를 적극 추진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선언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규제기관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변화를 주도하겠다고 나선 사례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원자력 규제는 보수성이 미덕인 영역이지만, 그 보수성이 필요한 안전 요건에 집중될 때와 불필요한 관행에 고착될 때의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영국의 이 실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규제기관이 스스로 변화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원자력 르네상스의 성패를 가를 가장 조용하고도 중요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