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7. 1. 04:54ㆍ원자력 뉴스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라는 단어를 들으면 많은 분들이 데이터센터를 떠올리실 겁니다. 인공지능 학습에 필요한 막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빅테크 기업들이 SMR에 뛰어든다는 소식이 워낙 자주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려온 소식은 조금 결이 다릅니다. 엑슨모빌, 셰브런, 코노코필립스 같은 정유·석유화학 기업들이, 그리고 철강사 누코(Nucor)까지 나서서 원자력을 자신들의 공장 안으로 끌어들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데이터센터의 전력난을 풀어주던 원자력이, 이번에는 왜 정유공장과 제철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걸까요.

정유 대기업들은 원자력에서 무엇을 보았나
2026년 6월 29일, 산업용 첨단원자력 컨소시엄(Industrial Advanced Nuclear Consortium, 이하 IANC)이 "적용 시나리오 백서(Application Scenarios White Paper)"를 발표했습니다. IANC는 2025년 출범한 단체로, 창립 멤버 자체가 눈에 띕니다. 엑슨모빌, 셰브런, 코노코필립스, 광물기업 프리포트-맥모란, 철강사 누코가 처음부터 함께했고 이후 셸과 리오틴토까지 합류했습니다. 원자로를 만드는 회사들의 모임이 아니라, 원자로를 쓰겠다는 산업 최종 수요자들의 모임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백서가 제시한 적용 분야는 네 가지입니다. 부유식 해양 설비나 전용 플랫폼에 열과 전력을 공급하는 해양 원자력, 정유·석유화학·LNG 시설에서 기존 가스 보일러나 열병합설비를 대체하는 원자력 열병합, 디젤이나 LNG에 의존하던 원격 광산·유전 현장의 전력·공정열 공급, 그리고 알루미늄 제련이나 제철처럼 전력을 많이 쓰는 제조업의 기저전력입니다. 이 네 분야의 공통점은 모두 24시간 끊김 없이 일정한 열과 전력을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가 유독 어려운 업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SMR과 MMR(초소형모듈원자로, Micro Modular Reactor)은 발전소라기보다 "원자력 보일러"에 가까운 형태로 설계됩니다. 공장 담장 안에 들어가 전력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공정에 열과 전기를 공급하는, 이른바 계량기 후단(behind-the-meter) 발전기로 통합되는 방식입니다. 정유공장이 원자로를 마치 하나의 생산설비처럼 들여놓는다는 뜻입니다.
왜 지금, 산업계가 먼저 움직였나
이번 백서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기술이 아니라 순서입니다. 엑슨모빌의 기술도입 자문 모한 칼야나라만(Mohan Kalyanaraman)은 "산업이 원자력에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먼저 명확히 정의해, 2030년까지 산업 프로젝트에 적용 가능한 옵션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산업이 원자력에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명확히 정의해 2030년까지 산업 프로젝트에 적용 가능한 옵션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지금까지 SMR 산업은 원자로 개발사가 먼저 기술을 만들고, 그 기술을 사줄 고객을 나중에 찾아다니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IANC의 접근은 이를 뒤집습니다. 정유·화학·광업 기업들이 모여 "우리 공장에는 이런 조건의 열원이 필요하다"는 요구조건을 먼저 정의하고, 이를 원자로 벤더와 EPC(설계·조달·시공) 기업, 유틸리티, 국립연구소, 규제기관, 금융권까지 포함한 생태계 전체에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컨소시엄은 다음 단계로 시나리오별 기술 아키텍처 정의, 규제 검토, 상업 모델 설계를 예고한 상태입니다.
이 구조 전환이 갖는 의미는 단순합니다. 데이터센터 중심이던 SMR 수요처가 중공업으로 확장되는 변곡점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오클로(Oklo), 엑스에너지(X-energy), 카이로스파워(Kairos Power) 같은 SMR·MMR 개발사 입장에서는 새로운 산업 고객군이 통째로 열리는 셈입니다.

한국 기업에는 어떤 기회로 연결되나
이 소식이 한국과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중동과 동남아시아에서 다수의 정유·석유화학 플랜트 EPC 사업을 수행해 왔습니다. 만약 산업용 원자력 열원이 정유 설비의 표준 구성 요소로 자리 잡는다면, 플랜트 설계 단계에서부터 원자력 열원 결합형 설계 옵션을 함께 검토해야 하는 시점이 올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발주처가 생긴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원자로의 열을 정유 공정의 증류탑이나 석유화학 반응기에 효율적으로 전달하려면, 열수력(熱水力, 원자로 내 열과 유체의 흐름을 다루는 공학 분야) 해석과 노심 설계 역량이 공정 엔지니어링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한국이 원전 건설 과정에서 축적해 온 열수력·노심해석 역량을, 발전소가 아닌 공정열 통합 엔지니어링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철강사 누코의 참여도 곱씹어 볼 대목입니다. 전력집약 제조업에 가해지는 탄소국경조정 압력이 원자력 수요로 직결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탄소국경조정이란 수입품의 생산 과정에서 배출된 탄소량에 따라 관세 성격의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로, 철강이나 석유화학처럼 에너지를 많이 쓰는 업종일수록 직접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누코가 원자력으로 눈을 돌렸다는 사실은, 국내 철강·석유화학 업계가 탈탄소 전략을 다시 점검할 때 참고할 만한 선행 사례가 됩니다.
그래서 이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유공장에 원자로가 들어선다는 발상이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리를 따져보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유 공정은 원래도 막대한 열과 전기를 필요로 했고, 그 열원이 가스 보일러였느냐 원자로였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만 그 선택을 누가 먼저 정의하느냐가 달라졌습니다. 원자로 회사가 아니라 정유회사와 철강회사가 직접 나서서 "우리에게 필요한 원자력은 이런 모습"이라고 요구조건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 그것이 이번 백서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데이터센터 다음 정거장이 정유공장이라면, 그다음 정거장이 어디일지도 함께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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