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2. 23:40ㆍ원자력 뉴스
"원자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핵폭탄이나 원전 사고를 연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원자력 기술이 전립선암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의약품 원료로 쓰이고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2026년 5월, Bill Gates가 설립한 TerraPower의 자회사 TerraPower Isotopes(TPI)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세계 최대 규모의 악티늄-225(Ac-225) 제조시설 착공식을 열었습니다. 투자 규모는 약 4억 5천만 달러. 그리고 이 시설의 원료는 냉전 시대 핵무기 프로그램을 위해 비축해둔 우라늄에서 옵니다.
원자력과 암 치료라는 두 단어가 한 문장 안에서 만나는 이 역설적인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냉전의 유산이 암 환자를 살린다는 게 무슨 뜻인가
Ac-225의 출발점은 Oak Ridge 국립연구소 창고 깊숙이 보관된 우라늄-233(U-233)입니다. U-233은 냉전 시대 핵 프로그램의 산물로, 수십 년 동안 엄격하게 격리·보관되어 왔습니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이 비축분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과정에서, U-233이 자연적으로 붕괴하면서 생성되는 Ac-225를 분리·추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방사성 원소는 스스로 붕괴하면서 다른 원소로 변합니다. U-233은 수십만 년에 걸쳐 여러 단계의 붕괴를 거치는데, 그 중간 산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Ac-225입니다. 핵무기를 위해 만들어졌던 물질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암세포를 파괴하는 의약품의 원료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재활용이 아닙니다. 냉전이 남긴 핵 유산을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Ac-225는 어떻게 암세포만 골라서 공격하는가
Ac-225가 암 치료에 쓰이는 이유는 이 원소가 방출하는 입자의 특성 때문입니다. Ac-225는 붕괴 과정에서 알파입자(α particle)를 방출합니다. 알파입자는 헬륨 원자핵, 즉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진 입자입니다.
알파입자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에너지가 매우 강력해 세포 DNA를 직접 절단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도달 거리가 극히 짧아 체내에서 불과 수십 마이크로미터(머리카락 굵기 수준) 안에서 에너지를 모두 소진합니다.
이 두 특성의 조합이 핵심입니다. 종양세포에 특이적으로 결합하는 표적 분자(항체나 펩타이드)에 Ac-225를 붙여 투여하면, 방사성 탄두가 달린 유도 미사일처럼 암세포 바로 옆에서 폭발합니다. 주변 정상 세포는 알파입자의 짧은 도달 거리 덕분에 손상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이 치료법을 표적 알파치료제(Targeted Alpha Therapy, TAT)라고 부릅니다.
전립선암에서는 PSMA(전립선 특이적 막 항원)라는 단백질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혈액암에서는 암세포 표면의 특정 수용체를 겨냥합니다. 기존 항암화학요법이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입니다.
왜 지금 이 시설이 필요한가 — 공급 병목이 치료를 막고 있었다
TAT 기술의 효과가 임상 연구를 통해 입증되면서, Novartis·Eli Lilly·AstraZeneca 같은 글로벌 제약사들이 방사성 의약품 개발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원료입니다.
Ac-225는 현재 전 세계에서 극소량만 생산됩니다. 앞서 설명한 U-233 비축분에서 추출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주요 공급원이지만, 생산량이 제한적이어서 임상시험조차 원료 부족으로 제약을 받아왔습니다.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병목이 존재해왔습니다.
TPI가 필라델피아에 짓는 'Bellwether Laboratory'는 이 병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약 23,000㎡ 규모로 2029년 중후반 완공을 목표로 하며, 완공 시 Ac-225의 글로벌 생산 능력이 기존 대비 20배 확대됩니다. TPI가 워싱턴주 에버렛에 운영 중인 기존 시설과 합산하면, Ac-225 공급 병목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습니다.
20배 확대라는 숫자가 실감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재 Ac-225 공급 부족으로 임상시험 참여조차 대기 중인 환자들이 전 세계에 있습니다. 이 시설이 가동되면 그 대기 줄이 극적으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원자력·제약·바이오가 융합하는 새로운 산업 지형
TerraPower는 원래 차세대 원자로(나트륨 냉각 고속로, Natrium)를 개발하는 회사입니다. 그 회사가 암 치료제 원료를 생산하는 자회사를 세우고, 수천억 원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TerraPower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자력 기술이 에너지 생산 영역을 넘어 의료·바이오 분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Ac-225 같은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산하려면 핵물질 취급 역량, 방사선 방호 엔지니어링, 동위원소 분리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원자력 산업이 수십 년간 축적해온 핵심 역량입니다.
반면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표적 분자를 설계하고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두 산업이 만나는 지점에서 방사성 의약품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원자력이 원료를 공급하고, 제약·바이오가 이를 치료제로 완성하는 분업 구조입니다.
냉전 시대 핵 경쟁이 남긴 우라늄 비축분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 전립선암·혈액암 환자의 치료제 원료가 되고 있습니다. 원자력이 가진 에너지, 즉 원자핵의 변환에서 나오는 그 힘이, 이번에는 암세포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정밀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핵"이라는 단어 앞에 자동으로 따라붙던 공포의 이미지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면 이 글의 역할은 충분히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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