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탈핵의 역전 — 스페인 Almaraz에서 시작되는 원전 귀환 3막

2026. 5. 21. 22:58원자력 뉴스

"원전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유럽에서 원자력의 미래를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반응이 대체로 이러했습니다. 독일은 2023년 마지막 원전 3기의 전원을 내렸고, 벨기에도 탈핵 일정을 확정지었습니다. 유럽의 탈핵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흐름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독일과 벨기에가 각각 탈핵 결정을 재검토하거나 수명 연장을 검토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고, 이제 스페인이 그 다음 무대에 올랐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스페인 원전, 지금 어떤 상황인가

스페인에는 현재 7기의 원자로가 가동 중입니다. Almaraz I·II, Ascó I·II, Cofrentes, Trillo, Vandellós II — 합산 설비용량은 약 7,123MWe(메가와트 전기)로, 스페인 전체 전력의 약 20%를 담당합니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쓰는 전기가 원자력에서 나오는 셈입니다.

그런데 스페인 정부는 2019년 합의를 통해 이 원전들을 2027년부터 2035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모두 폐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가장 먼저 문을 닫을 원전이 바로 Almaraz입니다. 1호기는 2027년, 2호기는 2028년 폐쇄 예정입니다.

Almaraz는 스페인 전체 소비 전력의 7% 이상을 공급하는 핵심 발전소입니다. 이 한 곳이 멈추면 그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 이것이 지금 스페인 에너지 정책의 핵심 질문이 되었습니다.


"3년만 더" — 연장 논의의 속사정

2026년 현재, 스페인 원자력산업협회(Foro Nuclear)와 유틸리티 기업들은 Almaraz의 운영을 3년 연장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결정은 2026년 안에 스페인 정부가 내려야 합니다.

Foro Nuclear 협회장 마르타 우갈데는 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미국의 사례를 들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같은 설계의 원자로들이 80년 운영 허가를 받고 있습니다." Almaraz가 지금 노후 발전소라서 닫는 게 아니라, 정치적 결정으로 닫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Almaraz의 지분 구조를 보면 왜 산업계가 이렇게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지 이해가 됩니다. Iberdrola가 53%, Endesa가 36%, Naturgy가 11%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에너지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들이 모두 이해 당사자인 셈입니다.

의회 지형도 흥미롭습니다. 스페인 의회는 2025년 2월, 탈핵 계획을 재검토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171 대 164로 통과시켰습니다. 중도우파 국민당(PP)이 주도한 이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의회의 민심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반면 현 집권 사회당(PSOE) 내각은 탈핵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정치적 교착 상태입니다.


유럽 탈핵 역전의 3막 구조

스페인의 상황을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유럽에서 진행 중인 탈핵 재검토 흐름의 세 번째 막임을 알 수 있습니다.

1막은 독일이었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핵을 선언하고 2023년 마지막 원전을 닫았지만, 이후 전력 가격 급등과 러시아산 가스 의존 심화가 비판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탈핵 이후 독일의 탄소 배출량이 오히려 늘었다는 데이터도 제출되었습니다.

2막은 벨기에입니다. 벨기에 역시 탈핵 일정을 정해 두었다가, 전력 안보 우려를 이유로 일부 원전의 수명 연장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3막이 스페인입니다. 소스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탈리아도 원자력 법제화를 추진 중입니다. 탈핵을 선언했거나 원전이 없었던 유럽 국가들이 잇따라 방향을 틀거나 재고하는 흐름입니다.

왜 이 흐름이 만들어졌을까요? 세 가지 압력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에너지 안보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를 느꼈습니다. 탄소를 내뿜지 않으면서 날씨에 관계없이 안정적으로 전기를 만들 수 있는 원자력의 가치가 재조명되었습니다.

둘째, 탄소 감축 목표입니다. 유럽연합은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태양광·풍력만으로는 기저 부하(전력망이 항상 유지해야 하는 최소 전력량)를 안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이 퍼지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Almaraz가 닫힌 뒤 그 공백을 가스로 메우게 되면 EU 탄소 감축 목표에 역행한다는 딜레마가 지적됩니다.

셋째, 전력 가격입니다. 탈핵 이후 전력 가격이 오른 나라들의 사례는 유권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스페인의 경우에도 Almaraz 폐쇄 이후 전기요금 상승 압력이 커지면, 원전에 대한 여론이 더 우호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결정이 왜 중요한가

Almaraz에 대한 스페인 정부의 3년 연장 결정은 단순히 발전소 하나의 수명 문제가 아닙니다. 이 결정이 어느 방향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2027~2035년 스페인 전체 탈핵 일정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만약 3년 연장이 허가된다면, 나머지 원전들의 운영 연장 논의에도 탄력이 붙을 것입니다. 반대로 정부가 예정대로 폐쇄를 강행한다면, 스페인은 그 공백을 어떤 에너지원으로 채울 것인지 훨씬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아야 하는 압력에 직면하게 됩니다.

유럽 전체를 놓고 봐도, 탈핵을 선언했던 나라들이 현실과 타협하는 이 흐름은 의미심장합니다. 원전을 단번에 끄는 것이 기후·에너지·경제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인식이 유럽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 넓어지고 있습니다.

Almaraz의 불이 꺼질지, 아니면 조금 더 켜져 있을지 — 2026년 안에 결론이 납니다. 그 결론이 유럽 에너지 지도를 어떻게 바꿀지, 스페인의 선택을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