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5. 04:41ㆍ원자력 뉴스
체코, 폴란드, 중동. 요즘 원자력 뉴스에서 한국이 이름을 올리는 무대들입니다. KHNP(한국수력원자력)가 APR1400이라는 대형 원전으로 수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2026년 5월, 러시아에서 조용하지만 묵직한 소식이 하나 나왔습니다. 러시아 국영 원전 기업 Rosatom이 신형 대형 원전 VVER-TOI의 상업 운전을 공식 개시하고, 20억 kWh(킬로와트시) 이상의 전력을 발전했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이 뉴스가 왜 한국에 중요한지, 그 의미를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VVER-TOI, 어떤 원전인가요?
VVER-TOI는 Rosatom이 개발한 Gen III+(3세대 플러스) 대형 가압경수로입니다. Gen III+, 즉 '3세대 플러스'란 체르노빌·후쿠시마 이후 강화된 안전 기준을 완전히 충족하면서도 경제성을 높인 최신 세대의 상업용 원자로를 뜻합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신규 수주 경쟁이 가장 치열한 바로 그 원자로 유형입니다.
기존 러시아 표준 모델인 VVER-1200이 1,200 MWe(메가와트 전기) 용량이었다면, VVER-TOI는 1,250 MWe로 출력을 더 키우고 주·수동 안전계통을 통합 설계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외부 전원이 끊기더라도 물리 법칙 — 중력, 대류, 열팽창 — 만으로 원자로를 냉각할 수 있는 설계를 기본으로 넣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주요 설비의 설계 수명이 기존 대비 2배로 늘었습니다.
이 원전은 러시아 서부 Kursk II(쿠르스크 2) 부지에 건설 중입니다. 1호기는 2018년 착공해 2024년 12월 전력 계통에 연결됐고, 2026년 5월 1일 공식 상업 운전을 개시했습니다. 착공부터 상업 운전까지 약 8년이 걸린 셈입니다. 2·3호기는 현재 건설 중이며, 4기 전체는 2034년 완공이 목표입니다.
경쟁 원전들과 비교하면 어디에 서 있나요?
원전 수출 시장에서 경쟁하는 Gen III+ 원자로들을 나란히 놓아보면 VVER-TOI의 위치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 APR1400 (한국, KHNP): 1,400 MWe. 아랍에밀리트 바라카 원전 4기로 완공 레퍼런스 보유.
- VVER-TOI (러시아, Rosatom): 1,250 MWe. 2026년 5월 상업 운전 개시로 이제 막 레퍼런스 획득.
- AP1000 (미국, Westinghouse): 1,100 MWe. 미국 조지아주 보글 원전으로 레퍼런스 보유.
- EPR (프랑스, EDF): 1,600 MWe. 핀란드·영국 등에서 공사 지연 이슈로 경쟁력 논란.
이 그림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원전 수출 협상에서 발주국은 반드시 "이 원전이 실제로 어디선가 돌아가고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완공·운영 실적, 즉 레퍼런스가 없으면 수주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VVER-TOI는 이제 그 실적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Rosatom은 현재 이집트(El Dabaa), 방글라데시(Rooppur), 헝가리(Paks II), 튀르키예(Akkuyu) 등에 원전을 수출하거나 건설 중입니다. 이 나라들에게 Rosatom은 이제 "우리 기술은 이미 상업 운전 중"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 원전 수출에 무엇이 달라지나요?
솔직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VVER-TOI의 상업 운전 개시는 Rosatom이 이미 강했던 수출 경쟁력을 한 단계 더 강화하는 사건입니다.
체코와 폴란드는 현재 신규 원전 건설을 검토하고 있고, KHNP의 APR1400이 유력한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됩니다. 중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장에서 한국이 경쟁해야 하는 상대가 바로 Rosatom입니다. 그리고 Rosatom은 금융 조달(국가 보증 차관), 연료 공급, 운전원 교육, 사후 서비스까지 패키지로 제공하는 능력을 갖춘 경쟁자입니다.
그렇다면 APR1400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미 손에 있습니다. 바라카 원전 4기 완공 실적입니다. 아랍에밀리트에서 APR1400 4기를 차질 없이 완공한 것은 세계 원전 건설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성과입니다. 여기에 건설 기간과 비용 경쟁력을 구체적인 데이터로 부각하는 전략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한 가지 더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 Kursk II 부지는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불과 60km 거리에 있습니다.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 부지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원전 안전 리스크에 관한 국제 사회의 시각을 자극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이는 수출 경쟁에서 한국이 간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맥락이기도 합니다.
Gen III+를 둘러싼 더 큰 그림
VVER-TOI 상업 운전 개시와 함께, 5월 21일 Rosatom은 고속중성자로 BN-1200M 9기 건설 계획도 발표했습니다. 고속중성자로(Fast Neutron Reactor)란 일반 원전과 달리 사용후핵연료를 다시 연료로 쓸 수 있어 '핵연료 순환(fuel cycle)' 문제를 해결하는 차세대 원자로입니다. Gen III+(VVER-TOI)와 Gen IV(BN-1200M)를 동시에 실적으로 쌓아가는 나라는 현재 지구상에서 러시아뿐입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전 수출은 단순히 하나의 기계를 파는 거래가 아닙니다. 발주국은 수십 년간의 기술 지원, 연료 공급, 운전·정비 역량까지 패키지로 구매하는 것입니다. 한국이 원전 수출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경쟁하려면, APR1400이라는 제품 하나를 넘어서 원전 산업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을 키워가야 한다는 압력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마무리
Rosatom의 VVER-TOI는 이제 말이 아닌 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원전 수출 시장은 "좋은 설계"만으로 이기는 곳이 아닙니다. 실제로 켜지고 돌아가는 원전, 그 실적이 협상 테이블을 좌우합니다. 한국 원전의 강점과 약점을 냉정하게 보는 것이, 오히려 수출 경쟁에서 더 나은 전략을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체코와 폴란드 수주전의 다음 소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앞으로 함께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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