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이 AI 인프라의 '전략 자산'이 된 날

2026. 5. 24. 02:22원자력 뉴스

AI라는 단어가 뉴스에 등장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AI 기사 옆에 낯선 이웃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원자력 발전소입니다. "왜 AI 회사들이 갑자기 핵발전소에 관심을 갖는 거지?" 하고 의아하게 느끼셨다면, 오늘 그 이유를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AI 데이터센터가 전력을 얼마나 먹는가

ChatGPT 한 번 질문하는 데 필요한 전력은 구글 검색의 약 10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 세계 수십억 명이 하루에도 수십 번 AI를 쓰는 시대가 됐을 때, 그 전력이 어디서 오는지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EU는 현재 유럽 내 3~5개 지점에 AI 기가팩토리(AI Gigafactory)를 구축하는 계획을 추진 중입니다. AI 기가팩토리란 10만 개 이상의 AI 반도체 칩으로 구성된 초대형 슈퍼컴퓨팅 클러스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AI 연산을 위한 거대한 공장입니다. 2025년 10월 기준 이미 16개 EU 회원국에서 76건의 입찰 신청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유럽의 AI 주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쟁에서 어느 나라가 유리할까요? 반도체 기술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AI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려면 24시간 365일 끊기지 않는 대용량 전력이 필요하고, 그 전력이 저탄소여야 한다는 조건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원자력이 등장합니다.

프랑스가 꺼낸 카드 — 원전 62GW

5월 21일, 프랑스 전력공사 EDF가 Ardian(사모펀드), Capgemini, iliad Group 등과 함께 AION이라는 컨소시엄을 결성하고 EU AI 기가팩토리 유치 입찰에 뛰어들었습니다.

컨소시엄이 내세운 핵심 경쟁력은 기술력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전력이었습니다. EDF 이사 Béatrice Bigois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프랑스는 EDF와 그 주로 원자력·재생에너지로 구성된 전력 믹스 덕분에 풍부하고 경쟁력 있는 저탄소 전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AI 인프라 유치를 위한 주요 자산입니다."

 

프랑스가 보유한 원자력 발전 용량은 약 62GW(기가와트)입니다. 비교하자면, 한국 전체 발전 설비 용량이 약 140GW 수준이니, 프랑스 원전 하나만으로도 한국 총 발전 용량의 절반에 가까운 셈입니다. 이미 EDF는 데이터센터 운영사 Data4와 12년짜리 핵발전 전력 공급 계약(40MW)을 맺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이미 시작된 흐름

이 현상이 유럽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Microsoft, Google, Amazon, Meta 등이 이미 원전 및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와 전력 구매 계약(PPA, Power Purchase Agreement)을 속속 체결하고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2013년 조기 폐쇄됐던 Crystal River 원전 인근 지역사회에서는 원전 재개·신규 건설에 대한 긍정적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AI 데이터센터와 전기화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을 감당할 전력원이 마땅치 않기 때문입니다.

스웨덴도 같은 흐름 위에 있습니다. 스웨덴 원자로 개발사 Blykalla는 최근 납냉각 소형원자로 6기(총 330MW) 건설 허가를 신청하면서, "약 15만 가구·대형 산업 시설·중형 데이터센터에 공급 가능한 전력 규모"를 핵심 셀링 포인트로 내세웠습니다. AI 데이터센터를 위한 원전, 이미 설계 단계에서부터 타깃이 명시된 셈입니다.

왜 원자력인가 — 재생에너지로는 안 되나요?

이 질문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태양광·풍력이 이미 충분히 싸고 깨끗한데, 왜 굳이 원자력인가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에는 두 가지 핵심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밀도입니다. 데이터센터는 좁은 공간에서 엄청난 양의 전력을 소비합니다. 태양광·풍력은 넓은 면적이 필요하고, 날씨에 따라 출력이 변동됩니다. 둘째는 안정성입니다. AI 연산이 진행되는 중에 전력이 끊기면 치명적입니다.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합니다.

원자력은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합니다. 연료만 있으면 날씨와 무관하게 365일 같은 출력을 냅니다. 그리고 이산화탄소 배출이 없습니다. 기업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 충족에도 유리합니다.

물론 원자력의 단점도 있습니다. 건설 기간이 길고, 초기 비용이 큽니다. 그러나 AI 수요가 앞으로 10년, 20년간 지속될 것이 명확해진 지금,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전력원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자력의 재정의

이번 EU AI 기가팩토리 유치 경쟁에서 원자력이 보여준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원자력은 더 이상 "위험하다 vs 안전하다"는 논쟁의 대상만이 아닙니다. 국가 AI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 자산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원전 PPA를 앞다투어 체결하고, 유럽이 원전 전력을 AI 기가팩토리 유치의 무기로 삼는 흐름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국가와 기업이 AI 시대의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높아진 세계에서, 원자력이 그 열쇠 중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한국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원전 62GW를 보유한 프랑스가 EU AI 기가팩토리 유치에 원전 전력을 무기로 꺼내드는 지금, 한국의 원자력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