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늄은 캐도, 전기는 못 만든다 — 카자흐스탄의 45억 달러 원전 도박

2026. 5. 25. 04:46원자력 뉴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우라늄이 땅속에 묻혀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전 세계 원전 연료의 절반 가까이를 공급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원자력발전소가 단 한 기도 없습니다.

카자흐스탄 이야기입니다.

"세계 최대 우라늄 수출국인데 왜 원전이 없지?" 이 질문은 사실 꽤 날카롭습니다. 우라늄을 캐내 수출하면 돈은 벌 수 있지만, 그 연료로 전기를 만들어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카자흐스탄이 지금 그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려 하고 있습니다. 45억 달러짜리 원전 현지화 계획을 들고서.


왜 지금, 왜 원전인가

카자흐스탄은 이미 결심을 내렸습니다. 2026년 4월, 토카예프 대통령이 '2050년까지 원자력 산업 발전 전략'을 승인하고 최소 3기(최대 4기)의 원전 운영을 국가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선언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정표입니다.

첫 번째 원전은 알마티 지역 발하쉬 호수(Lake Balkhash) 인근 울켄(Ulken) 부지에 짓습니다. 러시아 Rosatom이 이끄는 국제 컨소시엄이 2025년 6월 시공 주체로 선정되었고, VVER-1200(120만 kW급 가압경수로) 2기를 건설할 계획입니다. VVER-1200은 Rosatom의 3세대+(Generation III+) 주력 원자로 모델로, 이집트·방글라데시·헝가리·튀르키예 등 여러 나라에 수출이 진행 중인 기종입니다.

두 번째 원전 부지도 2026년 1월 잠빌(Zhambyl) 지역으로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중국 CNNC가 우선 계약자입니다. 2026년 안에 러시아와의 IGA(정부간 협정)·EPC(설계·조달·시공) 계약 서명이 카자흐스탄 원자력 에너지청의 최우선 과제로 잡혀 있습니다.

원전을 짓겠다는 결심 자체는 이미 굳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원전을 짓는다"와 "원전 산업국이 된다"는 다르다

원자력발전소를 하나 짓는 것과, 원전 산업의 역량을 국내에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카자흐스탄은 지금 후자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026년 5월 14일, 카자흐스탄 정부는 Resolution No. 400으로 '원자력 산업 생산 현지화 발전 종합계획 2026-2030'을 공식 채택했습니다. 핵심 목표는 하나입니다. 원전 착공 이전까지 현지 조달 비율을 현재의 20~22%에서 30%로 끌어올리는 것. 이 30%가 곧 시장 규모 약 40~45억 달러에 해당합니다.

현지화(Localization)란, 쉽게 말해 외국에서 사 오던 부품·소재·장비를 자국 기업이 직접 만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원전 하나를 지으려면 수만 가지의 부품이 들어갑니다. 증기발생기, 제어봉 구동장치, 펌프, 밸브, 배관, 계측 장비…. 이것들을 전부 수입에 의존하면 비용이 늘고, 기술 주권도 없고, 장기적으로 유지보수도 남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스스로 진단한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내 핵 관련 소재·장비 제조 기업 수 부족, 일부 생산시설의 국제 안전기준 미충족, 공급자 등록제(registry) 부재.
— '원자력 산업 생산 현지화 발전 종합계획 2026-2030'

 

우라늄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캐내지만, 그것을 원전 부품으로 가공하고 조립할 산업 생태계는 아직 없다는 솔직한 자기 고백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획은 네 가지 중점 분야를 제시했습니다. ① 규제 프레임워크 개발 및 법제화, ② 국내 시장 역량 분석, ③ 생산시설 현대화 및 신규 구축, ④ 디지털화 공정 도입. 그리고 공급자 등록제 신설, 국제 안전기준 인증 지원, 외국 기업과의 기술이전 협약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 한국의 자리는 어디인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카자흐스탄 원전의 두 축은 지금 러시아 Rosatom과 중국 CNNC입니다. 첫 번째 원전은 Rosatom 컨소시엄, 두 번째는 CNNC가 우선 계약자입니다. 카자흐스탄이 지리적·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연한 구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에게 기회가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진입 시점일 수 있습니다.

원전 건설의 최종 계약자(Rosatom·CNNC)가 된다는 것과, 원전에 들어가는 부품·소재·서비스를 공급하는 공급망 기업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쟁입니다. 45억 달러 현지화 시장은 Rosatom과 CNNC가 혼자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계획 자체가 "외국 기업과의 기술이전 협약"을 명시하고 있고, "국제 안전기준(ISO/ASME) 인증 보유 기업"을 공급자 등록제의 우선 등재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원자력 부품·소재 기업들은 이미 APR1400을 비롯한 국내외 원전 건설 과정에서 국제 인증을 취득하고 공급망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이 자격 요건에 해당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습니다. 카자흐스탄이 공급자 등록제를 도입하기 전에 먼저 진입 전략을 세우는 것, 이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 큰 그림도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Kazatomprom(세계 최대 우라늄 생산기업)을 통해 러시아(원전 건설), 중국(두 번째 원전) 두 트랙에서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를 우려하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시각에서, 한국은 기술력이 검증된 대안 파트너 후보입니다. 핵연료 가공 분야에서의 협력 가능성도 있고, 향후 세 번째·네 번째 원전에서는 판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라늄 생산국의 다음 단계

세계 원전 시장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랫동안 연료를 공급하는 역할에 머물렀던 나라들이 직접 전기를 만드는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행보는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구체적입니다. Resolution No. 400이라는 공식 계획으로, 착공 전까지 현지화 30%를 달성하겠다는 수치 목표까지 못 박았습니다. IAEA 사무총장 Grossi의 카자흐스탄 방문도 조만간 예정되어 있어 국제 규제 협력 논의까지 진행 중입니다.

물론 갈 길은 멉니다. 우라늄을 캐는 것과 원전을 운영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광석을 파내는 것과 반도체를 만드는 것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큽니다. 현지 제조 기업이 부족하고, 국제 안전기준을 충족하는 시설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카자흐스탄 정부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솔직한 인정이 오히려 중요한 신호입니다. 문제를 알고 있는 나라가 외부 협력자를 가장 절실하게 원합니다. 45억 달러의 시장은 닫힌 것이 아니라, 지금 막 열리고 있습니다.

원전 건설이 본격화되는 2026년 말 IGA·EPC 계약 체결 시점, 그리고 공급자 등록제가 시행되는 시점이 이 시장의 문이 실질적으로 열리는 때입니다. 그 전에 포지션을 잡아두는 것과 그 후에 뒤늦게 참여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